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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A Mar 21. 2021

[리뷰] 이소라의 봄, 그리고 나의, 아직 슬픈 봄

이소라, 하면 눈을 감고 조용히 노래부르는 모습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그의 노래를 많이, 잘 아는 건 아니지만 우연히 방송에서 보거나 드라마 OST로 만나는 그의 목소리는 어떤 편안함이 있어 좋았다. 그러다 더 좋아하게 된 계기는, <TRACK 9>를 듣고 난 후였다. 한창 "나는 한 번도 삶을 원한 적이 없는데 태어났다"는 생각으로 괴로웠을 때였다. 이 노래를 들으며 나의 생각이 이상한 게 아니라는 사실에 위로받았던 것 같다.


지난 3월 14일, 이소라의 온라인 콘서트 <위로와 치유>에서 몰랐던 노래들을 더 알게됐다. 새로 애정하게 된 두 곡이 있다. <봄>, 그리고 <Amen>.


*


봄, 기다림



요즘의 사람들은

기다림을 모르는지

미련도 없이 너무 쉽게

쉽게 헤어집니다

...

여름이 가고 가을오면

원망도 깊어져가요

겨울이 지나 봄이 오면

또 기다릴 수 있겠죠


- <봄> 중에서



<봄>의 화자는 누군가를 기다린다. 봄에 시작된 기다림은 여름, 가을이 깊어갈수록 원망으로 바뀐다. 그렇게 겨울을 보내고 또 봄이 찾아오면 기다림은 다시, 시작된다. 기다림은 슬프다. 계절은 인간의 불가항력으로 반복되니 슬픔은 계속, 있을 것이다.


마침 이 글을 쓰면서 어떤 사람의 전화를 기다리는 중이었는데, 약속한 시간에 전화가 오지 않는다. 무슨 일이 있는 거겠지 하며 기다린다. 가끔 친한 친구와 신나게 톡을 하다가 갑자기 응답이 끊기고 몇 시간 후에 올 때도, 아주 조금 섭섭하다. 상대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토록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지는 마음이라니. 이건 내 탓이 아니다. 기다림이라는 본질 자체가 소외이기 때문이다.


나의 여름은 뜨겁고, 가을은 시리고, 겨울은 즐겁고, 봄은 슬프다. 주관적인 계절감이다. 봄은 아직 가시지 않은 추위에 몸을 웅크려야 하는 계절의 끝 어딘가에 시작되어, 이제 막 피어난 꽃을 감상하려 사진 몇 장만 찍으면 곧 사라지는 계절이다. 그래서 봄은 조금 애매하고 공허하다. 


노랗고 작게 핀 개나리가 연약하게 흔들리는 봄에는 나의 사랑하는 사람이 떠오른다. 그 사람을 가을에 잃어버리고 결국 나 혼자, 따뜻한 날을 맞이했다. 볕이, 봄이 슬픈 나만의 이유다. 어쩌면 흩날리는 벚꽃잎 아래 '그대'이름을 여러번 찬양하는 노래나, 그 사람들더러 멍청이라고 놀리는 노래보다는 이 노래가 나를 비롯한 어떤 사람들의 봄에는 제격일 것이다.




Amen, 사랑



수 많은 밤을 남 모르게

별을 헤며 날 위로해

강해지길 기도하고

지나간 이별로 울기도 해

...


나의 방황을 나의 가난을

별에 기도해 다 잊기로 해

나의 욕망을 나의 절망을

다 잊기로 해 나를 믿기로 해


...

나의 욕망을 나의 절망을

다 잊기로 해 나를 믿기로 해

나의 평안을 나의 사랑을

별에 기도해 날 믿기로 해


- <Amen> 중에서



나를 더 사랑하고 싶다면, 사랑과 반대되는 것들은 버리기로, 잊기로 결심해야 한다. 예를 들면 방황과 가난, 욕망과 절망.


찌꺼기를 잊기로 한 결심은 어떤 믿음에 가깝다. 증거가 없는 미래를 향해 품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다음에는 더 나아지겠지,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겠지. 다른 누구가 아닌 바로 자신을 다독이려는 마음이 아름답다. 도저히 용기낼 수 없을 것 같은 상태에서 한 발 내딛으려는 서투른 몸짓. 나는 나를 응원해야 한다.


태어나 삶을 배워야 한다면, 주제는 인생과 슬픔이겠지. 위에는 구원이 있고 아래에는 사랑이 흐른다. 나의 어쩌지 못함을 별에 기도하는 행위가 구원을 바라는 마음이고, 이 마음이 자신을 더 사랑하고픈 소망에서 비롯한다면.  


*


<봄>의 화자는 어쩌지 못한 슬픔을 계속 마주한 운명에 서 있다면 <Amen>의 화자는 조금씩 밀어내고자 애쓰는 것 같다. 둘은 똑같이 슬픈 상태이지만 의지는 조금 다르다. 


최근에 어떤 친구로부터 내가 슬픔을 좋아하는 것 같다는 말을 들었다. 그 친구도 오래 고민하다 나에게 말한 것 같다. 알고 있었지만 남에게 들으니 느낌이 달랐다. 내가 읽고 추천한 책을 읽고 친구는 많이 울었지만, 나는 한 번도 울지 않았다. 친구는 그 책을 '슬픔'이라 읽고 나는 그 책을 '진실'이라 해석했기 때문이다. 내가 삶의 진실이라 믿었던 것이 슬픔의 얼굴이었다니. 


친구는, 슬픔 속에 달콤함이 있다는 걸 안다고 나쁜 뜻은 아니라고 말했지만, 나는 그의 말에 어떤 위기감을 느꼈다. 그 달콤함이 오래 지속되면 힘들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다. 


다른 친구에게 물었다. "슬픔을 좋아하는 게 나쁜 거야?" 물었다. 그 애는, "그렇지는 않아, 그래도 이제는 마음을 새로 먹어야지 너도." 라며 날 책망하고 응원했다. 콘서트 이후 <봄>과 <Amen>, 이 두 노래를 번갈아 들었던 이유가 있었나보다. '아직' 슬픈 것이지, 앞으로 쭉 그러지는 않았으면 좋겠다고 바라고 있나보다.


*


닿을 수 있는 목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소라의 개인적인 삶도 슬픔보다 기쁨과 사랑으로 더욱 가득 채워지길 바란다. 콘서트에서 그가 요즘 기운을 잃어가고 있다고 한 말이 마음에 걸린다. 적어도 내가 받은 위로만큼이라도 그의 삶에 단비같은 위로와 치유가 적절히 함께하기를. 그가 알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노래로 베푼 위로가 그에게 똑같은 정도의 사랑으로 돌아가면 좋겠다. 그건 아주 큰 사랑일 것이다. 






이 리뷰는 문화예술플랫폼 아트인사이트(https://www.artinsight.co.kr/)의 문화초대로 작성하였습니다.

**원문링크: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52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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