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파란 벽>, 지혜림 작가
이 인터뷰는 작가가 자신의 그림책에 어울리는 키워드를 선정하고, 해당 키워드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인터뷰입니다.
#차별 #불안 #공존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이미지 스토리텔러, 지혜림 입니다.
‘이미지 스토리텔러'라고 자신을 소개하시는 이유가 궁금해요.
그림을 그리다보면 사회 현상과 그것이 의미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고민하게 되더라고요. 그림과 이미지를 통해 이야기를 전달하는 법을 연구하고 있어서, 제 자신을 그렇게 정의하고 싶습니다.
이번에 첫 그림책을 발간하셨죠. <파란 벽>은 어떤 작품인가요?
이 그림책은 차별과 공존에 관해 말하고 있는 책입니다. 원래는 함께 살던 한 마을의 사람들이 어떤 사건을 계기로 분리되고, 커다란 파란 벽을 만들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어요.
‘차별'이라는 주제를 선택하신 계기가 있나요?
책 <선량한 차별주의자>라는 책에서 직접적인 아이디어를 얻었습니다. 이 책에서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개념을 접하고 거기서부터 이 그림책의 핵심 소재인 ‘윗마을과 아랫마을'을 떠올렸죠. 그 책에는 직업이나 인종이나 신체적 상황이 다른 사례들이 나오는데, <파란 벽>을 작업할 때 윗마을과 아랫마을 사람들을 구분짓는 개별적 특징을 따로 설정하진 않았어요. 단지 두 마을의 물리적인 위치만 다를 뿐이죠.
그렇군요. 평소 글이나 다른 매체에서도 영감을 얻으시나요?
네, 그런 편이예요. 평소 전시를 많이 보려고 노력하는데요, 최수진 작가의 'Warm-eaten Drawings' 작품에서 영향을 받았습니다. 멀리서 보면 아름다운 조형물인 것 같은데, 가까이서 보면 수많은 구멍이 뚫려있었어요. 사회적 약자의 현실을 가까이 들여다보면 이런 모양이지 않을까 생각하며 보았습니다.
특히 코로나 펜데믹 시기를 겪으며 인종별, 세대간, 성별간 갈등이 심해지고 혐오 범죄까지 벌어지는 등 상황이 악화되기도 했잖아요. 그래서 이 작업에 더 집중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사실 남녀차별, 노인혐오부터 시작해서 집단 이기주의와 국수주의까지, 특정 집단을 향한 차별과 혐오는 과거부터 시작해서 현재까지도 없어지지 않았죠. 이번 작업을 통해 차별에 관한 이슈를 다시 한번 새롭게 조명해보고 싶었습니다.
차별과 배제는 어떻게 다를까요? 나와 맞지 않는 사람까지 애써 포용할 필요는 없잖아요.
인간관계에서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배제는 필요하죠. 안 맞는 사람과 억지로 함께할 순 없으니까요. 하지만, '잣대를 내려놓는 일'도 여전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루기 쉽지 않은 주제예요.
평소 관심있던 주제였는데도 아이디에이션 과정이 쉽지 않았어요. '차별'이 무엇이고, 이 주제에 접근하기 위해서 어떤 지식과 정보가 필요한지 리서치하고 내용을 완전히 흡수하는데만 6개월 정도 걸렸거든요. 그 후에 아이디어 발상 및 구체화를 하는 데는 3개월정도 걸린 것 같네요. 그런데 허무하게도 핵심적인 아이디어를 탄탄하게 만드는 건 단 2주였어요. 그 기간 동안 이 책의 큰 틀을 다졌습니다. 그 전까지의 시간을 견디지 못했다면 이 책은 나올 수 없었겠죠.
연료를 태우는 시간이었나 봐요. 저도 같은 작업자로서 공감이 되는데요, 그 절정의 순간을 위해 무수한 시간을 버리거나, 쌓아가는 시간인 것 같아요.
재밌는 에피소드가 있는데, 정말 좋은 작품을 완성하고 싶어서 밤을 새우며 작업을 이어가던 중이었어요. 그날은 정말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아서 괴로움에 낮잠을 청했는데 잠에 빠지려고 한 순간 기울어진 땅과 두 마을 사람들의 모습이 떠올랐어요. 제 무의식이 사인을 보낸 거죠.
두번째 키워드 #불안에 관해 얘기해주세요.
그림책에서, 윗마을 사람들이 처음부터 벽을 세우고 차별을 했던 건 아니에요. 내 것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 위험에 빠지고 싶지 않은 불안함이 과해져 아랫마을 사람들을 차별하고 쫓아낸 거죠. 이러한 설정은 팬데믹을 겪으며 기사로 종종 접했던 현상을 보고 떠올렸어요. 원래 그러지 않았던 사람들도 생계의 위험, 더 나아가 코비드 19에 걸릴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이 증폭되어 인종, 연령, 성별에 대한 혐오를 드러냈죠.
차별의 원인으로서 불안이군요.
맞습니다. 혐오의 시작은 ‘불안’이라고 생각했어요. 저도 어떤 면에서는 불안함이 높은 편이라 평정심을 찾으려고 무척 애를 써요. 사람이, 불안한 감정을 품더라도, 그것을 어떤 방향으로 끌고 가느냐는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다소 인공적인 느낌의 파란색과 노란색 대비가 시각적으로 ‘불안’의 감정을 효과적으로 불러일으킵니다. 파란색, 노란색, 분홍색, 검정색 이 네 가지 제한된 색감은 어떻게 결정하셨나요?
처음에 정한 색 팔레트는 가짓수도 많고 좀 더 클래식한 느낌의 색 조합이었어요. 하지만 이야기를 진행하면서 좀 정제되고 그래픽적인 느낌이 강한 선명한 색감이 감정을 더 잘 전달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죠. 파란색이 가진 색의 속성이 차갑기에 벽의 차가움을 효과적으로 만들어 주는 것 같아요. 짙은 파란색의 보색이 노란색이기에 선정했어요.
커다란 불이 일렁이는 장면이 굉장히 인상적이었어요. 이 장면은 어떤 과정을 거쳐 완성하셨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먼저 실제 불의 형상을 최대한 많이 보려고 노력했어요. 활활 타오르는 불을 실제 눈앞에 가져다 놓고 관찰하는 건 어렵기에 사진 이미지나 영상으로 움직이는 불을 봤어요. 그 다음으로는 직관적으로 구도를 잡고 바로 그림 작업에 들어갔던 것 같아요. 이 장면을 완성하기 전에 2번 정도 이미지를 그렸는데 선의 사이가 너무 넓으니 불이 아닌 패턴으로 이루어진 면지 같아 보였어요. 한 장면을 작업하는 데에 많은 시간이 들어서 다시 그리는 게 속상하기도 했지만 원하는 느낌이 나올 때까지 계속 시도했어요.
그림 이야기 더 듣고싶어요. 스타일은 어떻게 잡으셨나요? 그림책 작가들이 많은 시간 할애하는 부분이기도 한데.
대표적으로 캐릭터 그리기 방식을 설명하자면, 초반에 스타일은 조금 더 구체적이고 인물의 눈코입도 있었어요. 사람의 의상에도 주름이 더 많고 두께감이 느껴졌죠. 그림을 그리는 과정에서 좀 더 그래픽적이고 율동감있게 그리고 큰 덩어리의 형태로 직관적인 느낌을 주는 방향으로 바꿨습니다. 그러다보니 캐릭터의 표정이 없는 게 더 깔끔하고 전체 스타일과 어우러진다는 걸 알게 되었죠.
결말이 꽤 무시무시합니다. 아이들에게 어려울 것 같기도 해요.
그러지않아도 우려한 부분이에요. 특히 결말을 어떻게 내야 할지 고민이 많았습니다. 다른 방식으로 시도해보기도 했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하면, 제가 원하는 방향으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처음에 결정했던 대로 결말을 냈어요. 고민했지만, 아이들에게도 이런 개념을 정확하게 얘기해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아이들도 언젠간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마주하게 될 이야기고 아이들이 아예 모르지도 않고요. 어쩌면 이렇게 그림책의 은유로 배울수 있다는 건 아이들에게 더 좋은 방법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대상이 아이들이라고 해서 꼭 예쁜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달해야 하는지, 생각해볼만 한 이슈예요. 작가님의 작업 과정을 들으니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을 그림책 작가들이 많이 고민할 것 같아요.
제가 고민한 시간만큼 이런 결말을 내고, 이야기 흐름을 갖게 된 이유를 지금은 더 이해하게 되었어요. 어쩌면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한 특정한 방식이 있어야 한다는 건, 그게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어른들의 편견일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공존'은 어떤 걸까요?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는 거요.
실천이 쉽지는 않은 것 같아요. 우리가 계속해서 이런 이슈를 생각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겠고요.
아까 차별과 배제의 차이에 관해 조금 이야기하기도 했는데 ‘공존' 역시 모든 사람을 환대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에요. 그저 다른 상태로 같이 존재하는 거죠. 한쪽을 공격하거나 상처 입히지 않은 채로요.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메시지가 상냥한 편은 아니예요.
어떻게 보여줄까, 고민한 부분입니다. 말하고 싶은 마음을 앞세우지 않기 위해 조심스러웠고요. 어떻게 해야 교훈을 담으면서도 독자가 피로하지 않을 수 있을까? 훈수를 두는 느낌이 들지 않을지 생각했습니다. 분명히 껄끄러운 사람도 있을 테니까요. 하지만 결국 무언가를 일깨우기 위해서는 불편할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작가님 잔다르크같아요. 그런 말 들어보셨나요?
요즘 많이 언급되는 mbti를 해봤을 때 용의주도한 전략가로 나오지만 그림을 그리는 순간에는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 같아요. 그런 면에서 그림을 그릴 때에 제 페르소나는 잔다르크일 수도 있겠네요.
그림책에서 베스트 한 장면을 골라주세요.
극의 말미에 큰 나무에 번개가 치는 장면이요. 이 장면에서 이야기가 전혀 다른 흐름으로 전환되거든요. 윗마을 사람들이 쌓아 올린 파란 벽이 어떤 역할을 하게끔 만들어주는 사건입니다. 또 이 장면의 나무는 실제 연필과 펜으로 세밀하게 그렸는데 제가 원하는 형태와 음영이 잘 표현되어 좋았어요.
누구에게 이 책을 가장 보여주고 싶은가요?
평소에 이런 이슈에 관해 큰 관심이 없던 누군가가 이 책을 읽고 마음에 아주 작은 일렁임을 느꼈으면 합니다. 아이들을 비롯해서 타인과의 관계를 맺는 모든 사람들, 혹은 차별 당하거나 자신도 모르게 차별을 했던 모두가 이 책을 보았으면 해요.
그림책 재료로 어떤 걸 사용하시나요?
건식 재료 일부와 디지털 드로잉을 혼합해서 사용했습니다. 저는 그림 그릴 때 가끔 스스로도 강박적이라는 생각을 종종 하는데요. 이 책을 만들 당시 강박이 더 심해져 디지털 드로잉을 썼었어요. 작은 점 하나, 얇은 선 하나 모든 것을 통제하고 정성을 들여 만들고자 했었어요. 점 하나를 잘못 찍으면 다시 찍을 수 있다는 게 디지털의 큰 장점이죠. 그 당시엔 그게 저에게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었지만, 가끔 이런 스스로의 기법으로부터 자유롭고 싶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림에는 옳은 방법도 없고 사람에게는 다양한 면이 존재하기 때문에 저의 다양한 면을 스스로 탐구하고 싶어요.
주로 작업 아이디어는 어디서 얻나요?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닥치는 대로 수집하는 편이예요. 좋은 작품은 영화, 시, 문학, 예술작품에서부터 시작해서 뉴스나 어떤 강연 영상까지 결국 많은 데이터들이 내 안에서 흡수되고 쌓여야 저절로 나온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강박적으로 다양한 콘텐츠를 보았던 것 같아요.
작업을 하는 나만의 루틴이 있다면?
그날 기분에 따라 맞추어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틀어요. 음악을 듣는 이유는 매번 흰 종이를 마주할 때마다 두려움을 이겨내는 용기가 필요해서요. 이번 그림이 망칠 수도 있다는 두려움, 시간을 낭비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등을 이겨내는 용기가 필요해요.
작업을 하며 좋은 점과 나쁜 점은 무엇인가요?
그림 작업을 하면서 좋은 점은, 무한한 가능성 사이를 누비며 설렘과 두근거림을 느낄 수 있다는 것.
나쁜 점은 확정적이지 않은, 즉 끝이 보이지 않는 두려움을 직면해야 한다는 것. 가끔 보면 그림은 저와 밀당 하는 것 같아요. 매력적인 상대와 연애하는 것과 비슷하달까요. 한없이 그림이 잘 나오다가도 이제 되었다 싶으면 갑자기 만족스럽지 못한 결과가 나오기도 하고, 계속 만족스럽지 못한 결과물을 만들다가도 가끔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하고요. 또, 한 주제를 골똘히 연구하고 분석하는 것이 재미있으면서 타인과 교류를 자제해야 할 작업 시기에는 고독함을 느낄 때가 있어요.
앞으로 어떤 작업을 하는 작가가 되고 싶은가요?
작가마다 관심 분야가 다른데 돌이켜보면 저는 주로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이야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사회적 약자의 이야기를 담은 책,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는 이야기를 하고 싶고요, 개인의 내면에 관한 이야기도 풀어내고 싶어요.
좋아하는 그림책 한 권 추천해주세요.
다비드 칼리와 클라우디아 팔마루치의 <누가 진짜 나일까>요. 그림작가 중 클라우디아 팔마루치를 정말 좋아하는데 클라우디아 팔마루치는 고전적이면서도 현대적인 느낌을 동시에 지니고 있어서 그의 그림을 보면 제 마음이 편안해져요. 다비드칼리의 책은 안 본 책이 적을 정도로 정말 좋아해요.
다비드 칼리는 뻔할 것 같은 소재도 늘 매우 재치있게 풀어내서 처음엔 그냥 보다가 극의 말미에 '헉!!'소리나게 하는 면이 있죠. 그림책 작가로서 한가지 소원이 있어요. 제가 열심히 능력치를 쌓아서 언젠가 다비드칼리 작가님과 책 작업을 하는 게 소원이에요. 이렇게 좋아하는 두 작가가 동시에 작업을 한 책인데 어떻게 안좋아할 수가 있겠어요? 최근에 두 분이 만든 '그림자의 섬'이라는 책도 그림적으로 감각적이고 내용적 의미도 깊어서 좋아요.
작가님의 첫번째 그림책이예요. 두 번째는 어떤 그림책이 될까요?
두 번째 그림책도 첫 번째 그림책을 펴내는 것 같은 정성과 노력을 들이고 싶어요. 스스로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하려고요. 처음은 늘 많은 정신적, 육체적 에너지가 들기 때문에 겁도 나지만 동시에 생각을 깨어있게 만들어주죠. 이야기 소재를 아직 결정하진 않았지만 <파란 벽> 책과 이어진 내용이면 좋을 것 같아요. 내면의 이야기도 언젠간 하고 싶은데, 아직 충분히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라면 그 소재는 생각보다 시간이 더 필요할 것 같습니다.
나에게 그림책이란?
저에게 그림책이란 정신을 깨어있게 만들고 눈빛을 살아있게 만드는 것이에요.
그림책 이야기를 만들고 그릴 때면 자신의 사고 체계로 세운 이야기에 늘 의문을 품고 되묻고 과감하게 엎어야 할 때가 많아요. 그러다 보니 이 이야기와 그림이 정말 맞는 것인가? 성찰을 하게 되고 스스로를 분석하다 보니, 그림책을 만들기 시작한 전과 비교해보았을 때 나와 다른 생각에 포용력도 커지고 내 이야기에 ‘당연한 건 없다’라는 생각을 갖게 되는 것 같아요. 이런 측면에서 그림책은 저에게 정말 고마운 존재예요. 글을 쓰고 그리며 많은 깨달음을 얻어가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