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floating cirlce>, 은지민 작가
작가가 자신의 그림책에 어울리는 키워드를 선정하고, 해당 키워드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인터뷰입니다.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미술가 은지민입니다.
-‘미술가'는 ‘그림책 작가'보단 좀 더 광범위한 느낌이 들어요.
그림책 외에도 일반 회화 작업과 교육 등 전반적인 미술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어서, 이렇게 소개하고 있어요.
-첫 번째 키워드, #명상은 작가님께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지 궁금해요.
우선 ‘생각’에 관한 개념을 정리해보면 좋겠어요. 우리가 어떤 걸 생각할 때 그 대상이 무엇인지에 따라, 혹은 중요도에 따라 생각하는 방식도 달라져요. 어떤 건 그냥 흘러가게 놔두기도 하지만, 어떤 생각은 붙잡고 늘어지기도 하는 것처럼. 이렇듯 생각에도 여러 종류가 있는데, 그 중에서도 명상은 나를 유연하게 하는 ‘쉼이 있는 사유'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명상은 생각의 한 종류라고 할 수 있군요. 명상에 관해 고민하시게 된 계기가 있나요?
코로나가 시작되기 전, 하루 스케줄을 가득 해치워나가며 무감각한 상태로 정신없이 지냈었어요. 그러다 코로나와 함께 모든 일과 업무들이 거품처럼 터지며 사라졌고, 강제로 주어진 ‘비워진 시간’이 바쁜 시간에 익숙했던 저를 자극했어요.
그제야 처음 쉬어본 것 같아요. 온갖 감정들이 낙엽처럼 떨어지며 수북하게 쌓이는 것을 느꼈어요. 흔히 ‘멍때린다'고 표현하죠. 고요하고, 조용한 상태에 머무르는 것이요. 이전까지는 항상 무언가 하고 있었다면, 이제는 의식적으로 ‘뭘 하지 않는 시간'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전에 알지 못했던 쉼을 편안히 누리는 시간의 중요성을 깨달은 거죠.
-‘생각'도 결국 무언가를 한다는 점에서 에너지가 들어가는 행위인 것 같은데, ’쉼이 있는 생각’이 명상이라고 하셨잖아요. 그건 어떻게 하는 건지, 작가님은 명상을 어떻게 하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저는 보통 새벽 시간에 명상해요. 새벽은 제가 아는 가장 조용한 시간이예요. 희미하게 밝고요. 그때 창문을 열어놓고 가만히 있어요. 가끔 향을 피우기도 합니다. 그러면 그때의 공간과 상황을 있는 그대로 느끼게 돼요. 예를 들면 공기의 온도, 창밖의 풍경, 빛의 모양, 피어오르는 향의 움직임 등.
5분, 10분 시간을 정해놓고, 감응하는 저의 몸을 느낍니다. 복잡한 생각과 우연한 생각들, 떠오르는 생각을 굳이 막지 않아요. 그 생각들을 단순화하거나 맥락화하지 않으려고 하고요. 이렇게 보면 아예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건 아니네요.
-쉼이란 결국 ‘나’를 벗어나는 것일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내가 아닌 주변의 존재에 몰입하는 것. 의식적으로 생각의 방향을 돌려야만 가능한 행위네요 쉼도, 명상도.
그렇죠. 명상은 다른 방식으로 몰입하는 행위예요. 내가 느끼는 감각의 형질을 바꾸는 의식적이고 또 무의식적인 생각이랄까요. 내 앞에 놓인 것을 있는 그대로 생생하게 보고 느끼는 상태에 이르는 것이죠.
-그림책 [Floating Circle]은 보통 책에서 보기 힘든 형태예요. 어떻게 고안하셨나요?
명상의 제스처를 책 읽는 방법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선택한 판형이에요. 다 펼치면 동그란 모양이 됩니다. 어떤 순환하는 개념을 담기에 아주 적합한 형태라고 생각했어요.
-동그란 원형에서 처음과 끝을 알 수 없는 무한함이 느껴지는데요, 미스테리한 느낌이 아니라 어떤 완전함에서 비롯된 편안하고 안정된 느낌에 더 가깝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군요.
-원래는 아주 크게 만드셨었죠?
관객들이 단순히 이 책을 보는 게 아니라 경험하길 바랐거든요. 책 읽기는 살아있는, 동적인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처음엔 책을 동그랗게 펼쳐 독자가 그 안에 들어가 그림과 글을 둘러볼 수 있도록 원지름 약 150cm 정도 큰 책을 만들었어요. 그런데 아무래도 보관이나 배송이 어려워서 독립출판을 할 땐 더 많은 사람이 볼 수 있도록 보급된 형태로 다시 디자인해서 만들게 되었습니다.
-초기 제작분은 표지가 도자기라 되게 무거웠잖아요. 근데 출간 책은 에어백에 포장된 형태로 돼 있고 크기도 작아서 공기처럼 가벼웠어요. 같은 책을 극적인 두 가지 방식으로 구현한 것도 재미있네요.
처음에는 ‘묵직한 생각을 담아낸 명상 아트북’이란 의미를 담으려고 책 표지를 도자기로 제작했었어요. 의도된 불편함이었죠. 단순히 ‘읽는 책'이 아닌 오브제 관점으로 책을 바라보고 접근했습니다. 그러다 출간 책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디자인도 바뀌고, 배송도 에어백에 하게 되었어요. 처음부터 의도한 건 아니었어요.
-두 작업에서 보이는 물질성의 극적인 차이가, 마치 생각의 양면성을 보여주는 것 같아요.
그렇게 보이기도 하네요.
-고양이를 그리게 된 계기가 있나요?
지금 저는 고양이를 키우고 있어서, 평소 자주 관찰하고 그리곤 했어요. 고양이는 저와 많은 시간을 보내는 아름답고 아릿한 존재입니다. 고양이를 틈틈이 들여다보면, 저 자신을 돌아보게 되더라고요. 계절이 수없이 바뀌고 그 변화에 무뎌진 저에게 고양이는 ‘지금-여기’에 집중할 수 있는 법을 알려줘요. 고양이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천천히 낯선 자신을 보게 됩니다.
-‘지금-여기’ 일어나는 일에 몰입하는 명상의 과정과 고양이의 행동에 공통점이 있군요.
믿기 힘드실 수도 있지만, 키우는 고양이 보면 정말 멍때릴 때가 있어요. 고양이의 행동은 분명 명상과 닮은 점이 있어요. 특히 이 그림책을 작업하면서는 장 그르니에 책, 『섬 Les Iles』의 두 번째 이야기 <고양이 물루>에서 직접적인 영감을 받았습니다. “동물의 세계는 침묵과 도약으로 이루어져 있다. 동물의 세계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완전히 이완된 상태거나 아니면 어떤 행동에 완전히 몰입한 상태다.” 이 문장에서요.
-고양이를 그릴 때 특별히 신경 쓴 부분이 있나요?
고양이라는 존재를, 단순히 컨셉을 잡기 위한 도구로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어요. 그래서 최대한 사실적인 형태에 기반해 그리되, 실루엣을 잡고 제스처만 남기는 방식으로 표현했습니다. 고양이 포즈를 더 다양하게 그려보라는 편집자 제안이 있긴 했는데, 저는 더 ‘그냥 있는 그대로의' 고양이를 그리고 싶었어요. 그래서 포즈도 고개를 드는 정도로만 변화를 주었어요. 멍때리는 고양이들의 진짜 포즈가 그렇거든요.
-에어브러쉬 표현이 감각적이에요.
하나부터 열까지 고양이가 여기는 이렇게 생겼고, 어떻게 움직인다는 등 고양이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는 그림은 제가 전달하고 싶은 주제에 적합한 그림이 아니었어요. 정확한 표현이 이 그림의 목적이 아니었죠. 그래서 에어브러쉬를 사용해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러면 가볍고, 모호한 느낌이 들어요. 형태가 흐릿하니까 독자에게는 시각적으로 답답한 느낌을 줄 수도 있는데, 그런 부분들이 이 그림책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고 생각해요.
-세 번째 키워드, #여백을 작가님의 언어로 한 번 더 설명해주신다면?
표면적으로는 비어 있다는 뜻이고, 상징적으로는 뭘 위하지 않는다는 의미예요. 일상에 비유하면 ‘특정한 목표를 좇지 않는다’란 뜻이 될 수 있고요. 그림 그리는 작업자 입장에선 ‘뭘 억지로 그리거나 표현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겠네요. 이런 의미를 담아서 그림도 무채색으로, 고양이도 거의 자취를 남기는 정도의 묘사로 표현됐어요.
-일상을 열심히 사는 바쁜 현대인에게 절실한 시간이 바로 ‘비어있는 시간'인 것 같기도 해요. 쉬워 보이지만 그만큼 어려운 일이 쉼인 것 같기도 하고요.
일상을 산다는 건 채우는 일의 연속이죠. 주어진 시간이 있고, 목표가 있고, 해야 하는 일 투성이니까. 이 그림책은 그런 채워야 하는 것들로부터 반대의 행위, ‘무위, ‘비워내기'를 지향하고 있어요. 참 아이러니하죠. 쉼과 휴식도, 의식적으로 해야 한다는 사실이요.
-종이에 고양이를 어떤 크기와 비율로 표현할지는 어떻게 결정하셨나요?
화지 너머로 보이지 않는 고양이의 제스처를 상상할 수 있도록 여백을 활용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화지 안팎으로 이미지를 배치했어요. 동그란 내지 안에 있는 고양이, 그리고 내지 밖으로 나간 고양이, 독자가 보는 고양이뿐 아니라 프레임을 넘나들도록 구성했습니다. 그 프레임이 고정된 형태로 보이지 않도록 작업했어요.
-그림책에서 베스트 한 장면을 꼽는다면? 그 이유는?
안개 속에서 고개를 드는 고양이의 모습이 나온 부분이요. 산의 능선과 고양이의 비스듬한 선이 어우러져 마음에 듭니다.
-이 작품을 꼭 보았으면 하는 사람은?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자신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는 사람. 머릿속에 해야 할 일들로 늘 꽉 차있는 사람, 자신의 느낌을 말하기가 꽤나 어색한 사람.
-그림책 재료로 어떤 걸 사용하시나요?
주로 에어브러쉬와 색연필을 사용합니다.
-작업 아이디어는 어디서 얻나요?
누구나 그렇겠지만, 정말 생활 곳곳 일상 곳곳에서 아이디어를 얻습니다. 내가 속한 일상에서 스스로 거리를 두는 순간에 나를 새롭게 발견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나를 열어두고 실험하는 시간이 필요하고요. 스스로 편협합을 자주 깨닫고 번번이 실패한다고 느낄 때도 있지만, 그래서 더욱 모든 것에 사려 깊은 마음을 가지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작업을 하는 나만의 루틴이 있다면?
특별한 루틴은 없어요. 루틴이 생기면 효율성을 생각하게 되고 반복이 습관을 만든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지속의 힘은 믿어요. 요즘엔 하이쿠 같은 하루에 한 문장씩 생각 정리를 하려고 합니다. 아이디어를 정리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편이고,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할 땐 몰아서 한 번에 그립니다.
-작업을 하며 좋은 점과 나쁜 점은 무엇인가요?
좋은 점은, 생생하게 살 수 있다는 것.
나쁜 점은, 잘 모르겠지만, 자본 중심 관점에선 쓸모의 척도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것? 그런데 유용하지 않아서 나를 억압하지 않아요. 결국 돌고 돌아 나쁜 점에 대한 질문에 물음표가 생긴거네요. 황지우 시인의 한 구절을 인용하고 싶습니다. "'시'란 금방 부서지기 쉬운 질그릇인데도, 우리는 그것으로 무엇인가를 떠 마신다."
-앞으로 어떤 작업을 하는 작가가 되고 싶은가요?
작업을 위한 작업, 무엇을 위한 작업이 아니라 정말 생생하게 생각하고 표현하는 사람. 작은 목소리도, 어정쩡할 지라도 분명하게 표현하는 미술가.
-좋아하는 그림책 한 권 추천해주세요.
고유한 취향을 드러낸 책들이요. 특히 브루노 무나리의 책을 거의 다 좋아합니다. 가츠미 고마가타의 책도요. 책 자체의 물성을 활용한 방식이 흥미롭거든요. 책이 내용을 담는 수단이 아니라 책 자체가 독자를 초대하는 다양한 방식에 관심 있습니다.
-작가님의 첫 번째 그림책이에요. 두 번째는 어떤 그림책이 될까요?
지금 두 가지 책을 동시에 작업하고 있어요. 바로 어린이책과 아트북입니다. 첫 책이 내면에 집중하는 책이었다면 다음 책은 나로부터 벗어나는 이야기, 주변을 둘러보는 책이 될 것 같아요.
-나에게 그림책이란?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생각의 틈. 내밀한 언어. 예기치 못한 느낌의 발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