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코끼리야' 고혜진 작가 인터뷰
작가가 자신의 그림책에 어울리는 키워드를 선정하고, 해당 키워드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인터뷰입니다.
#동물권 #정체성 #행복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자연과 동물의 이야기를 쓰고 그리는 작가 고혜진입니다.
주로 자연과 동물을 소재로 그림책을 만들게 된 계기가 있으신가요?
TV 프로그램 ‘동물의 왕국’을 어릴 때부터 좋아했어요. 약육강식 야생의 풍경이 잔인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저에겐 자연 자체가 지닌 역동적이고 자유로운 에너지가 굉장히 인상 깊었습니다. 그런 프로그램을 비롯한 동물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즐겨 보면서 사람보다 동물이 훨씬 더 순수한 존재라고 생각이 들었어요.
구체적으로 어떤 면에서 그런가요?
예를 들어, 사자는 배가 고플 때만 다른 동물을 잡아먹어요. 그렇다는 건 불필요하게 다른 동물을 해치지는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죠. 하지만 인간은 그렇지 않아요. 가지고 있는 것에서 만족하지 못하고 더 욕심을 부리며 착취하지만, 동물은 다릅니다. 철저히 본능에 따라 움직이거든요. 그들에겐 악의가 없다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KEYWORD 1. 동물권
첫 번째 키워드로 선정하신 ‘동물권’은 어떤 뜻인가요, 작가님의 언어로 한 번 더 설명해주신다면?
동물의 삶도 인간의 삶처럼, 안전하게 보호되어야 할 권리가 있다는 뜻이에요. 인간의 권리인 ‘인권'과 비교해 생각하면 쉬울 거예요. 인간 이외의 생명도 소중하다는 사실과 그들도 고통과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는 데서 출발하는 개념입니다.
초기 더미 작업 Ⓒ고혜진
코끼리가 아주 다양한 형태로 그려져 있어요. 판화 기법을 사용한 평면적인 표현이지만, 사실적인 묘사와는 다른 느낌으로 코끼리의 양감이나 역동성이 잘 느껴집니다. 드로잉을 정말 많이 하셨을 것 같아요.
사실 초기 더미를 만들었을 때 내용은 지금과 완전히 달랐습니다. 처음엔 코끼리의 조형적인 형태를 이용하는 작업이 흥미로워서 그 형태를 연구한 내용을 바탕으로 그림책을 만들려고 했거든요. 그런데 작업을 진행하면서 메시지를 담은 이야기를 쓰는 것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방향을 수정하게 됐어요.
어떻게 코끼리를 통해 동물권을 얘기하게 되셨는지 계기가 궁금해요.
어떤 메시지를 담을 수 있을까 고민하던 와중에 태국 여행 갔을 때의 일화가 떠올랐어요. 태국에서는 사람이 코끼리 등에 올라타서 산책할 수 있도록 만든 ‘코끼리 트래킹'이 관광 코스 중 하나로 자리 잡고 있어요. 그래서 다들 하는 것처럼 코끼리 트래킹을 하려고 했는데, 저의 남편이 “안 된다”고 말하더라고요. 그때까지만 해도 동물권에 관해 깊이 고려해보지 못했던 저로서는 새로운 충격이었어요.
저도 인터넷에서 본 적 있어요. 코끼리를 길들이기 위해 아기 때부터 줄에 묶어놓고 무력감을 학습시키기도 한다고 하더라고요. 깊이 들여다보지 않으면 세상의 면면을 인간 중심적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 같아요. 하지만 동물 또한 인간과 같은 생명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그 고통과 절망을 가늠해보기는 어렵지 않을 거예요. 태어나자마자 억압받고 지배당하는 현실. 그건 정말 끔찍한 일이죠.
맞아요. 그래서 결국 코끼리 트래킹은 포기했어요. 그런 상황에 처한 코끼리를 보는 것만으로도 미안한 마음이 들었거든요. 동시에 ‘이런 현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생각도 들었어요.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안타까운 현실의 이면을 알게 되길 바랐어요. 보여주고 싶었죠. 그래서 그 경험과 기억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야기를 <나는 코끼리야>에 담게 되었습니다.
KEYWORD 2. 정체성
<나는 코끼리야>는 제목부터 내용까지 코끼리의 ‘자기소개'라고 봐도 무방해요. 보통 우리가 자기를 소개할 때 이름과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잘하고 못하는 것, 이 정도를 말하는 것처럼 이 그림책의 코끼리도 마찬가지거든요. 그런데 단순한 소개 글이 아니죠?
책을 유심히 본 독자분들은 아실 거예요. 글에서 코끼리가 ‘못 하는 것'은 인간이 코끼리를 억압해 훈련시키는 내용, 즉 자연 상태의 코끼리는 할 필요가 없는 묘기에 가까운 내용을 말하고 있어요. 반면 ‘잘하는 것'은 자연에 있는 코끼리의 행위에 초점을 맞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사실 이 그림책에 담긴 메시지를 파악하는 핵심적인 힌트가 앞뒤 면지에 있어서, 면지를 잘 살펴봐야 해요. 일부러 앞의 면지는 경쾌한 색감과 단순한 형태의 판화 기법으로 표현했지만, 뒤의 면지는 사실적인 방법으로 묘사하고 회색조로 그렸어요. 우리 주변에서 관찰할 수 있는 모습과 가까운 코끼리를 떠올릴 수 있도록 말이죠. 표현 기법 뿐 아니라, 코끼리의 행위도 서로 달라요.
두 면지의 대구는 코끼리의 정체성이 인간의 손을 떠난 자연에 있다는 작가님의 생각을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장치이군요.
책을 처음 기획할 때 면지가 너무 설명적이라는 의견도 받았었어요. 그런데 독자의 반응은 예상과는 조금 달랐죠. 한 번에 눈치채지 못하는 독자들도 꽤 있거든요. 꼼꼼히 그림책을 보며 여기에 담긴 비밀을 발견하는 게 <나는 코끼리야>를 보는 묘미 중 하나이지 않을까 생각해요.
반면 내지는 온통 자연 속에 서식하는 코끼리의 모습으로 가득합니다.
코끼리에 관련된 다큐멘터리를 찾아보면서 코끼리가 언제 가장 코끼리다워질 수 있는지를 생각했어요. 코끼리가 있을 곳은 트래킹 관광 코스가 아니고 쇠창살을 두른 동물원의 작은 우리도 아니고, 드넓은 초원이라는 걸 깨달았죠. 흙과 풀이 있고 높은 나무가 자라는 곳, 태양과 바람이 몸을 감싸 안는 곳. 그런 곳을 그리려고 했습니다.
내지의 첫 페이지와 마지막 페이지 그림도 대구를 이루고 있네요. 비슷한 듯 조금 다른 풍경으로 그려졌는데, 하늘에 뜬 달 모양이 달라져서 시간의 흐름을 알 수 있었습니다. 내용과 어떤 관계가 있나요?
자료 조사를 하면서 아프리카코끼리, 아시아코끼리 등 종에 따른 특성이 있는데, 특히 아시아 코끼리는 무리 지어 대이동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코끼리의 이동을 그림책의 전체 흐름으로 잡고 스토리보드를 작업했습니다.
그림책의 코끼리들은 강을 건너고 들을 걷고 숲에 들어서기도 하고 산을 오르고 내려오기도 하는 등 어떤 여정에 있다는 걸 보여주고 있어요. 풍경의 변화와 함께 한두 마리의 코끼리가 크게 등장하는 장면, 많은 코끼리가 떼를 이룬 모습이 원경으로 나오는 장면 등을 배치해서 시각적인 리듬감을 만들었습니다.
그림은 그림만의 흐름을 만들고 글은 또 그 나름대로 작가의 의도를 명확히, 그러나 재치 있게 담고 있어서 글과 그림을 따로 떼어 봐도 흥미로워요. 그런데 어떤 장면은 글과 그림을 연결하기 쉬운데 어떤 장면에서는 아예 상관없어 보이기도 했어요.
이 그림책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부분은 글이에요. 글밥이 적어서 오히려 토씨 하나하나가 돋보였거든요. 단어 하나, 조사 하나 이런 것들이요. 전체적으로 이야기의 흐름이 코끼리가 자신에 관한 얘기를 늘어놓는 나열형이어서 지루해지진 않을까 걱정하기도 했고요. 그래서 글밥을 정말 많이 수정했어요. 그림책을 만들 때 글과 그림의 ‘적당한 거리'를 찾는 일이 힘들면서 재미있어요.
이 그림책을 다 보고 인간이 ‘악한 바보'라는 생각도 들었어요. 당연한 걸 알지 못하니까요.
‘코끼리는 코끼리일 뿐'이에요. 코끼리의 지능을 이용하는 건 학대나 다름없어요. 그건 코끼리를 코끼리의 정체성으로 인정하는 행위가 아니죠. 종(種)과 관계없이 그것이 지니는 정체성이 있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KEYWORD 3. 행복
예전에 출간하신 <행복한 여우>도 인상 깊게 보았는데요, 세 번째 키워드이기도 하네요. 행복에 관해 자주 생각하시나요?
그렇죠. 삶에서 가장 중요한 건 행복이 아닐까 생각해요. 행복은, 남하고 비교하는 순간 끝나버려요.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행복이 시작된다고 믿고 있어요.
코끼리는 언제 행복할까요?
자연에서 살 때 가장 행복할 거예요. <나는 코끼리야> 그림책이 코끼리를 대신해 인간에게 말해주었으면 해요, “여러분의 눈에 보이지 않아도 우리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라고요.
이 작품을 꼭 보았으면 하는 사람은?
동물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보면 마음 아파할 것 같아요. 그러니 동물을 싫어하거나, 동물권에 관해 생각해보지 않았던 분들께 추천하고 싶어요.
그림책에서 최고의 한 장면을 꼽는다면? 그 이유는?
아무래도 면지가 아닐까 생각해요. 면지는 이 그림책의 주제와 구조를 파악할 수 있는 핵심적인 힌트를 주고 있거든요. 앞, 뒷면지를 일부러 조형적으로 다른 스타일로 작업했습니다.
고혜진 작가
그림책 재료로 어떤 걸 사용하시나요?
고무판화와 디지털을 병행하여 작업했습니다. 고무판화로 작업한 그림을 스캔하고, 컴퓨터로 후반 작업을 하며 그림을 완성했어요.
주로 작업 아이디어는 어디서 얻나요?
일상이나 어린 시절의 경험, 인상 깊게 보았던 뉴스나 영화 등에서 영감을 얻습니다. 때론 저의 감정에 집중할 때도 아이디어를 얻곤 해요. 일상에서 떠오르는 생각의 씨앗을 틈틈이 메모해 두었다가 더미로 만듭니다. 예를 들면 요즘 작업하고 있는 저의 다음 그림책 <분홍 괴물>은, 베란다에서 상추를 키우다 애벌레를 보며 생각한 아이디어를 발전시켜 구상한 책이에요.
작업을 하며 좋은 점과 나쁜 점은 무엇인가요?
<나는 코끼리야>를 작업 할 땐 동물에 관한 다큐멘터리나 사진을 많이 봤는데, 마음이 안 좋더라고요. 예전에 북극곰에 대한 그림책 <어느 여름날>을 만들 때도 환경과 북극곰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볼 때 힘들었어요. 그런 감정적 노동을 단점으로 꼽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반면 장점은, 마음은 아플지 몰라도 그렇게 공부하며 동물의 권리에 대해 더 많이 인지하게 된다는 점이겠죠. 그림책을 만드는 일은 언제나 힘들지만 재미있는 작업이에요. 저한테 활력을 주는 현재의 가장 중요한 가치입니다.
앞으로 어떤 작업을 하는 작가가 되고 싶은가요?
지금처럼 꾸준히 작업하는 작가가 되고 싶어요. 제가 생각하는 소중한 가치를 하나씩 그림책으로 만드는 작가로 말이에요. 그림책이 마치 “저 여기 있어요”라고 저를 대신해 말해주는 매개 같아요.
좋아하는 그림책 한 권 추천해주세요.
좋아하는 책은 많지만, 저를 그림책 작가로 이끈 한 권의 책이 있다면 사노요꼬의 <백만번 산 고양이>입니다. 그 어떤 사랑에 관한 영화보다도 큰 감동을 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 그림책이에요. 담담하게 풀어낸 고양이의 사랑이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작가님의 다음 작업은 어떤 그림책이 될까요?
<분홍 괴물>과 <소리먹는 사자> 그림책 두 권을 작업하고 있습니다. <소리먹는 사자>는 4년전에 계약하고 결말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미뤄두고 있던 작품인데요, 이제 해결점을 찾아서 올해는 나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분홍 괴물>은 웅진주니어에서 나오는 두번째 책이에요. 이 책도 계약은 예전에 했었는데 일정상 출간이 늦어진 상태였어요. 어쩌다 보니 두 권이 차례로 출간될 것 같습니다.
나에게 그림책이란?
새로운 삶의 가치입니다. 그림책을 만들면서 인생을 바라보는 가치관도 변하면서 새로운 행복을 느꼈어요. 제 그림책 <행복한 여우>에 나오는 여우처럼 가치관이 바뀌면서 새로운 행복을 찾는 것처럼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