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cala' 김연정 작가 인터뷰
작가가 자신의 그림책에 어울리는 키워드를 선정하고, 해당 키워드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인터뷰입니다.
#동질감 #핑크 #기다림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저는 색연필로 그림을 그리는 창작자 김연정입니다.
색연필이 작가님께는 중요한 재료인가 봐요.
최근 4~5년 정도 주로 색연필을 사용해서 그림을 그려서인지, 저를 지칭하는 수식어로 적당하다고 생각했어요.
어떤 점에서 색연필을 꾸준히 사용하게 되셨는지 궁금해요.
색연필은 드로잉하기도 채색하기도 좋은 재료예요. 실수할 것에 대한 부담감이 적어서, 물감보다 더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거든요. 그리고 색연필을 꾹꾹 눌러 면적을 빈틈없이 칠했을 때 종이 결이 차분히 표현되는 질감에도 매력을 느껴서 계속 색연필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창작자'라고 소개하신 이유도 있나요?
저는 디자인 일도 그림 작업과 계속 병행해왔어요. 그러다 보니 그림책을 만들 때 들어가는 그림이나 내용 뿐 아니라 외형적인 디자인도 매우 신경을 쓰게 되더라고요. 이 과정이 되게 즐거워요. 그래서 그림을 그리고 디자인하는 전반적인 영역에서 창작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담아 이렇게 소개해봤습니다.
디자인은 디지털 툴을 다루는 영역이고 그림책은 손 그림이 차지하는 영역이 아무래도 더 크잖아요. 어쩌다 그림책을 만들게 되셨나요?
오래전부터 이미지로 이야기를 만들고 싶었어요. 영화 제작에도 관심 있었고 공부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글로 쓰는 이야기와 영화가 보여주는 이야기, 그림책으로 할 수 있는 이야기는 너무 다르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어릴 때부터 계속 그림을 그렸으니까, 그림책 제작을 먼저 시도하게 되었고요.
만들고 싶은 이야기는 어떤 종류인지 궁금해요. 특정한 장르나 주제가 있다면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뭐라고 뚜렷하고 간명하게 말씀드리기는 어렵네요. 장르적 성격을 말씀드리면 낭만적이기만 한 로맨스물이나, 완벽한 히어로가 등장하는 장르보다는 현실에 기반한 이야기를 좋아해요. 그러니까 주인공이 어딘가 부족해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걱정하게 만드는 그런 인물이 나오는 이야기요.
그런 주인공이 등장하는 이야기는 결말이 불투명한 것 같아요. 분명 고생도 할 테고. 그러다 역경을 극복하는 종류의 이야기인가요?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도 괜찮아요. 오히려 문제의 해결보단 주인공의 선택과 그 이유에 더 관심이 있어요. 제가 주목하는 건 '그런데도 걸어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거든요. 좋은 결말이 보장되어있지 않아도 꿋꿋이 자신의 길을 가려는 사람들의 이야기. 인생의 마지막은 죽음인데, 우리는 각자 나름의 방식대로 최선을 다해 생을 살아가는 것처럼요. 저의 책 'by cala'도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라는 점에서 이런 취향이 반영된 결과라고도 볼 수 있겠네요.
작가님과 칼라디움은 어떤 점에서 닮았다고 생각하셨나요?
자연 상태의 식물은 보통 한 곳에 뿌리를 내린 다음, 자기를 둘러싼 완벽한 자연환경에서 싹을 틔우고 성장하죠. 제가 집에 들인 칼라디움도 원래는 그랬어야 하지만, 인터넷 구매를 위한 클릭 몇 번으로 방에 들어와 있는 모양이 어느 순간 이상하게 느껴졌어요. 집 앞에 호수공원이 있어 종종 산책하는데 그곳에서 봤던 식물들에 비해 방 안의 칼라디움은 너무 연약하게만 보였거든요. 결국 한 달을 채우지 못하고 시들어 죽어버렸어요.
그렇게 조용히 죽어가는 칼라디움을 보며 동질감을 느꼈어요. 나는 식물이 아닌 사람인데도 두 다리가 묶여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딘가 무력하고 연약하고, 나에게 맞지 않는 환경에 놓인 느낌이고, 갈피를 못 잡고 방황하며 살아가는 모습 모든 게.
특별히 자신이 연약하다고 느껴질 때가 있나요?
그림책 학교에서 공부를 마칠 때쯤, 아예 프리랜서로 전향했어요. 그전까지는 계속 회사에 다녔는데, 완전히 혼자서 생활하게 된 거죠. 갑자기 관계가 단절된 시기였어요. 급격히 외로워졌고, 너무 사람하고 얘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서 삶에 대한 회의감이 몰려왔어요. 원래도 감정이 섬세한 편인데 이 정도의 큰 고립감은 처음 맛봤던 것 같아요. 그때가 딱 코로나가 시작된 시기이기도 했어요.
나이가 들수록 친구들을 만나기도 쉽지 않은데, 코로나 시기가 겹치니 사람을 만나기 더욱 힘들어졌죠. 그 대안으로 식물을 들인 건데,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공간에서 얼마 살지도 못하고 죽은 식물을 보니 동질감을 느꼈고 그때의 감정과 이야기를 고스란히 담게 되었어요.
마음이 외로울 땐 정말 사람이 그리워져요. 궁극적으론 사람과 연결되고 소통하길 바라시나요?
조금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완전히 그렇다고 말하기는 어려워요. 연결되고 싶은 마음으로 목표를 두었을 때 실패하면 좌절하잖아요. 물론 타인과 연결되고 원활히 소통할 때 얻는 만족감과 기쁨은 아주 커요. 하지만 타인은 제가 통제할 수 없는 변수라서 좌절할 확률이 높잖아요? 그래서 타인과의 연결과 소통 자체를 목표로 하진 않으려고 해요. 실제로 그 욕구를 항상 충족한다는 건 현실에서 거의 불가능하고요. 그래서 그런지, 타인에게 기대기보다는 혼자 있을 때 충만한 사람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더 많습니다.
작가님 이야기를 들으니까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책에서 릴케가 말한 고독이 생각나요. 우리는 여러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고 도움도 받지만, 본질적으로 타인으로부터 나의 고독을 채울 수는 없는 것 같아요. 혼자 있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죠.
가족이나 친구들과 교류하고 시간이 분명 필요해요. 타인의 삶도 존중하며 살펴야 하고, 그들의 근황을 듣고 어떤 일은 함께하면서 영향을 받기도 하죠. 그렇지만 나는 나대로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만 해요. 저는 그 과정이 외로울지언정 좌절할 만큼 힘들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꿋꿋하고 단단한 사람의 모습, 제가 되고 싶은 모습에 가까워요.
왜 키워드가 ‘분홍색'이 아닌 ‘핑크'인가요?
순전히 어감 때문입니다. ‘분홍색'보다 ‘핑크'라고 발음하는 것이 좀 더 어려 보이고 살짝 키치한 느낌인데, 저만 그럴까요?
책 뒷면이 온통 환한 분홍색이에요. 이렇게 디자인하신 이유가 있나요?
칼라디움의 어원 중에는 ‘심장’이라는 의미도 있어요. 그래서 처음엔 그런 개념과 연결해보려고 진홍색을 써볼까 고민하기도 했었어요. 그런데 최종적으로 메인 컬러를 핑크로 기획한 이유는, 빨간색보다 이런 여린 듯한 분홍색이 좀 덜 완전하고 덜 성숙한, 더 여린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에요.
그러고 보니 책 제목에도 ‘칼라’ 가 들어가 있네요. 컬러color와 칼라디움의 칼라cala 발음이 유사한데, 의도가 있을 거 같아요. 이 두 단어에 어떤 연관성이 있는, 제목에는 어떤 의미를 담았는지 궁금합니다.
제목에 ‘마음을 색과 그림으로 채운다’는 의미를 넣고 싶었어요. 그래서 처음에는 제목을 ‘Coloring the Heart’라고 지었어요. 하지만 진부하게 들린다는 의견이 있어서 ‘by Color’는 어떨까 고민했죠. 칼라디움은 ‘칼라디움 바이칼라Caladium bicolor’라고도 불리기 때문에, ‘bicolor’의 어감을 이용해서 색으로 무언가를 채우는 느낌을 주면서도 발음 그 자체로 칼라디움을 떠올릴 수 있으면 재밌겠다고 생각한거죠. 하지만 칼라디움에 대해 잘 모른다면 ‘by Color’를 봤을때 ‘칼라디움 바이칼라'를 떠올리기가 어려울테니, 한 번 더 꼬아서 로 제목을 정하게 되었어요. 몇 단계를 거쳐 칼라디움의 명칭도 들어가고, 제가 원하는 의미도 넣은 제목이 만들어져서 만족해요.
이 책 뒷면을 대강 봤을 땐 예쁜 색으로 채워져 있다는 정도로만 생각했었어요. 그런데 앞의 이야기를 다 읽고 뒷면을 한 장씩 넘기니까 아까 읽었던 글귀가 드문드문 떠오르며 감정이 증폭되는 느낌을 받았어요. 어딘가 비밀스럽기도 하고. 약간 형광을 띄는 이 분홍색은 가만히 쳐다보게 하는 힘이 있는 것 같아요.
칼라디움 종류는 매우 다양한데, 실제로도 분홍색이 차지하는 비율이 높거든요. 그래서 저는 칼라디움의 생명력을 은유할 수 있는 색이 붉은빛이 아니라 분홍빛에 가깝다고 생각했어요. 말씀하신 ‘가만히 쳐다보게 되는 힘'이 그런 느낌과 관련 있지 않을까 싶어요.
세 번째 키워드 ‘기다림'에 관해 설명해주세요.
이 책에는 두 발이 묶여 고립된 시기가 지나고, 언젠가 두 다리로 걸어 나가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어요. 그런데 여전히,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이 뚜렷하게 보이지도 않고 현재 혼란스러운 마음을 단단하게 묶어주는 확신이 있지도 않죠. 단지 어디론가 나아가기 전에 머물러 있는 단계를 솔직히 기록하려고 했어요. 이런 태도는 가만히 적당한 때를 기다리면서 격양된 마음을 추스르는 모습과도 비슷해서 세 번째 키워드를 ‘기다림'으로 정해보았습니다.
작가님이 선정하신 세 가지 키워드 중에 ‘외로움'이란 단어가 없어서 조금 의외였어요. 개인적으로 저는 이 책을 보며 어떤 외로운 감정이 강하게 느껴졌거든요.
저는 마음이 불안하면 외로워지는 편이에요. “옆에 누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계속 들고. 그럴 땐 한없이 기분이 아래로 가라앉아요. 그러다 끝내는 바닥을 치고 갑자기 싹 괜찮아지더라고요.
그런 외로움이 고조되었다가 사라지는 리듬에서 힌트를 얻어 이 책의 흐름을 구상하기도 했어요. 중요한 건, 외로움에만 머물러 있고 싶진 않다는 거예요. 저는 그 감정이 빨리 지나가길 바라고 기다려요. 그 마음을 엮으려고 했고, 외로움보다 기다리는 마음에 집중하고 싶었어요.
작가님이 말씀하신 어떤 흐름을 만드는 건 그림보다는 문장인 것처럼 보여요.
전체적으로 말이 끊기지 않고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문장을 정리했어요. 담백하면서도 짧은 문장으로도 완성된 의미를 전달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문장을 많이 수정했어요. 되도록 과도한 묘사는 피하려고 했고요.
책의 흐름을 보면 일반 코덱스 북이어도 무리는 없었을 것 같은데, 책을 아코디언 형태로 만드신 이유가 있나요?
처음에 일반 코덱스 형식으로 구성했을 땐 명확한 디자인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책의 전체적인 컬러가 돋보였으면 좋겠다는 단편적인 아이디어는 있었어요. 고민하다가 아코디언 형태라면 컬러를 확장해서 넓은 면적에 보여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제서야 드는 생각이지만 칼라디움 잎사귀들을 한 번에 볼 수 있어서도 좋아요. 리듬감도 느껴지고요. 책을 펼쳐놨을 때 햇빛을 받아 분홍색이 화사하게 빛날 때, 싱그러웠던 칼라디움 잎사귀도 떠오르고요.
무엇을 기다리시는지 여쭤보려고 했는데, “손님이 오기를" 이란 문장이 있네요.
날 도와줄 누군가가 왔으면 하는 마음은 항상 있어요. 그런데 이 ‘손님'이 의미하는 건 꼭 사람만은 아니에요.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좋은 기회나 소식이 될 수도 있죠. 그저 기다리는 행위는 굉장히 수동적인 태도라고 생각하긴 하는데 마음이 불안하고 무기력할 때는 기다림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느껴지거든요.
그런 무기력 속에서도 꿋꿋이 꽃을 피운 이야기네요. 무기력 자체가 낳은 이야기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 같고요.
그렇죠. 생각해보면 저를 억압하고 가두는 문제를 해소하고 싶다는 바람이 창작의 원동력도 되는 것 같아요. 불안하지 않은 나의 세계를 만들고 거기에 편하게 기대고 싶어요.
이 작품을 꼭 보았으면 하는 사람은?
홀로 긴 터널을 걷고 있는 사람.
그림책에서 최고의 한 장면을 꼽는다면? 그 이유는?
그림만 고려한다면 세 번째 그림(칼라디움 플로리다 뷰티)이 있는 페이지요. 가장 심미적으로 마음에 들어요. 텍스트와 함께 고려한다면 마지막 그림(칼라디움 화이트퀸)이 있는 페이지요. ‘다시 하얗게 다시 차분하게, 그 자리에서 가만히’ 문장과 온통 하얀 가운데 붉은 잎맥이 돋보이는 칼라디움의 그림이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이 책은 고립되고 외로웠던 시기를 기록한 작업이에요. 어떤 해결 방안을 제시하지 않고요. 제자리에서 가만히 ‘여름빛’이 그늘을 거둬 가주길 기다리며 한껏 고조되고 들뜬 외로운 마음이 다시 차분해졌을 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 같아요. 저는 그런 순간에서 늘 극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얻기 때문에 이 장면이 가장 마음에 들어요.
김연정 작가
그림책 재료로 어떤 걸 사용하시나요?
색연필, 종이, 아이패드, 컴퓨터, 직접 찍은 사진, 인터넷에서 수집한 사진, 각종 레퍼런스
주로 작업 아이디어는 어디서 얻나요?
아이디어는 문득 떠오르는 것 같아요. 버스에서 창밖 너머 풍경을 바라볼 때, 산책할 때 떠오르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주로 멍때릴 때요.
작업을 하며 좋은 점과 나쁜 점은 무엇인가요?
작업 하는 것 자체에는 좋은 점만 있는 것 같아요. 흐릿했던 초점을 선명하게 맞춰가며 스스로 명확해지는 기분이 들어요. 나쁜 점은 이렇게 좋은 점이 가득한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여러모로 희생할 현실적인 이유가 있다는 것이요.
앞으로 어떤 작업을 하는 작가가 되고 싶은가요?
현재는 아름다운 그림으로 아름다운 이야기를 하는 작가요. 아름답다는 말이 광범위하긴 하지만요.
좋아하는 그림책 한 권 추천해주세요.
너무나도 유명한 이수지 작가님의 <거울 속으로>요. 이 책을 보면 생각이 많아져요. 읽은 지 오래되었어도 장면들이 문득 떠오르곤 해요.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주면서도 간결하고 군더더기가 없어요. 책의 형식을 똑똑하게 이용한 멋진 책이에요.
작가님의 다음 작업은 어떤 그림책이 될까요?
어디론가로 움직이고 있는 사람의 이야기를 구상 중이에요.
나에게 그림책이란?
정성을 다한 일기 혹은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