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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단 Dec 05. 2019

Shift  + Delete

<1> 세상을 닮은 기술, 기술을 닮은 세상

"오늘 얼마나 죽었어?"
"하나도 안 죽었습니다."
"오 세상에 다행이다. "

중앙 재난안전대책본부에서 오가는 대화가 아니다. 국립 과학 수사연구소도 아니다. 저승사자 사무실은 더더욱 아니다. 매일 아침, 그것도 내 직장에서 들려오는 말들이다. 우리 회사에선 제품 평가 중 기대와 다른 결과가 나올 경우 그 제품을 '죽었다'라고 표현한다. 꽤나 섬뜩한 단어지만 내 직장은 이 말을 가장 많이 하고 듣는 장소 중 하나다. 정말 누군 가가 죽거나 산 게 아니라 얼마나 다행인지. 재밌는 에피소드들도 많다. 지하철, 버스 등 사람이 모인 장소에서 보고를 받은 부장님이 상기된 표정으로 "뭐?! 그게 죽었단 말이야? 도대체 몇 번째 죽이는 거야! 일 똑바로 못 해!?"라고 말했다가 순식간에 분위기를 범죄 영화로 만들어 버린다든지 하는 일 말이다. 그나마 제품을 안 죽게 만들어야 하는 개발팀과 달리, 제품을 많이 죽여야 성과를 달성하는 평가부서 상황은 한 층 더 심각하다. "이번에도 못 죽이면 너는 퇴근 못 할 줄 알아!!"부터 시작해서 "아무개야, 올해는 많이 죽여서 좋은데(대학원, 해외 파견 등) 도 가고 해야지 안 그래? " 등등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굴지의 프로 암살러로 오해받기 십상이다.

직장 내 단어 선택이 조금 살벌하긴 해도 사실 내가 만드는 제품은 굉장히 착한 제품이다. Solid State Drive, 일명 SSD. 노트북 사러 가면 스펙에 쓰여있는 '초고속 SSD 512GB 탑재'의 그 SSD이다. 이 친구가 하는 일은 기본적으로 어떤 정보를 저장 매체에 기록하는 일이다. 방대한 데이터를 빠르고 정확하게 기록해야 하며, 많은 외부 압력에도 자신의 기록에 대한 책임감과 사명감을 지녀야 한다는 점에서 법원이나 국회에 있는 속기사와 비슷하다. 물론 1초에 기록할 수 있는 단어가 약 750,000,000 개 정도로 조금 더 많긴 한다. 또 하나의 중요한 기능은 저장된 데이터를 원본 그대로 다시 되돌려 주는 일이다. 지금도 전 세계 수백만 개 데이터 센터에선 SSD들이 고객의 읽기 요청을 처리하느라 분주하다. 우리가 Instagram, facebook에서 스크롤을 오르내리며 눈팅하는 순간에도 SSD는 수많은 읽기 요청을 처리하고 있다. 이들이 조금이라도 일을 개을리하는 순간 우리는 흔히 '랙'이라고 말하는 버벅임 현상을 경험한다. 사람이 인지 불가능한 시간인 약 0.04초보다 늦게 데이터가 전달되어 버린 것이다! 999개의 일을 잘 처리해도 1개를 잘 못 처리하면 욕먹는 건 사람이나 SSD나 마찬가지다. (이런 경우 대부분의 사람들은 바로 눈앞에 보이는 핸드폰을 욕한다. 불쌍한 핸드폰 회사..)

저장 장치를 만드는 회사에 다니면서 이전엔 몰랐던 재밌는 사실들도 알게 되었다. Microsoft, Apple 임원쯤 되는 거물들이 실수로 노트북에서 어떤 파일을 지웠다며 복구해달라고 때 쓰는 일도 종종 있다. 원래 고객 실수로 지워진 데이터는 복구해주지 않는 것이 정책이다. (허용해 줬다간 우리 회사는 데이터 복구 전담 시설을 전 세계 방방곡곡에 지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 정도 거물급 부탁을 안 들어주면 제품 비즈니스에 직, 간접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로 해주는 경우가 있다. 간신히 복구에 성공해 엔지니어가 데이터를 확인해 보니 온 가족이 함께 찍은 여행 사진이 나와 훈훈하게 마무리된 경우도 있고, 이 글에선 차마 공개할 수 없는 황당한 일을 겪게 된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이 일화에서 우리는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데이터를 공짜로 복구하고 싶으면 글로벌 기업 임원이 되자! 가 아니고 컴퓨터에서 어떤 파일을 지웠다고 '정말로' 지워지진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Shift + Delete 기능을 통해 휴지통을 노 룩 패스로 지나쳤다면?!

결과는 마찬가지다. 아직 데이터는 SSD 내 '물리적으로' 보관되어 있다. 단지 저장된 위치를 가리키는 정보가 삭제되었을 뿐. 이쯤 되면 슬슬 궁금하다. 컴퓨터에서 어떤 파일을 지우면 SSD 내에선 어떤 일이 벌어질까? SSD를 하나의 책장이라 생각해 보자. 사용자는 이 책장에 어떤 책을 보관하거나 꺼내 읽거나 또는 더 이상 필요 없어져 책장에서 빼 처분하기도 한다. 퇴근 후 탈 영혼 모드로 놀던 중 부장님 전화를 받고 탈탈 털려 현타가 온 당신. 귀가 후 책장에 꽂혀 있던 '노는 만큼 성공한다'를 보고 분노가 차올라 그 책을 버리겠다고 결심했다. 이 결심은 Shift + Delete에 해당한다. SSD는 이 명령을 전달받고 '노는 만큼 성공한다' 책을 꺼내 책장 한구석 눈에 띠지 않는 장소로 옮겨 둔다. 당신은 책을 버렸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론 책장 한 귀퉁이에 보관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책은 언제 책장에서 사라지는 것일까? 이런 방식으로 책장을 관리하다 보면 새로운 책을 보관하기 위해선 진짜로 버리지 않고는 공간이 부족할 때가 온다. 바로 이때, 한 쪽 귀퉁이에 보관되고 있던 책들이 버려지게 된다. 이제 당신은 깨달았을 것이다. 어젯밤 완전 범죄(?)를 꿈꾸며 Shift + Delete 했던 야구 동영상이 실제론 지워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 사실을 아는 건 당신의 SSD뿐이니까.

Shift + Delete를 시전하고 후회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나는 어떤 물건을 버리자마자, 어떤 파일을 지우자마자 후회가 몰려오기도 한다. 이별을 말하고 예기치 못 한 감정에 휩싸인 적도 있다. 사람도, 사물도 부재는 존재를 더 극명하게 느끼게 해준다. 무언가가 내 삶에서 사라진 후에야 그 소중함을 느끼는 이 미련함은 도대체 학습을 통해 쉽게 개선되지가 않는다. SSD에 저장된 데이터는 'Shift + Delete'가 아니라 새로운 데이터에 의해서만 영구적으로 지워진다. 사람도 사랑도 결국 새로운 사람과 사랑을 통해서만 과거로부터 완전히 해방될 수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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