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어느 공원, 한쪽에서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구름 만지듯 허공을 쓰다듬고 있다. 발은 느리고, 팔은 물속을 유영하듯 부드럽다. 옆에 배드민턴 치는 사람들에 비하면 거의 슬로 모션이다.
그런데 묘하게 눈이 간다. 느린데 흐른다. 멈춘 것 같은데 면면히 이어진다.
처음 태극권을 보면 다들 이렇게 말한다. "저게 무술이라고?"
수백 년 전, 중국 허난성의 작은 농촌 마을 진가구에서 이 무술이 태어났다. 번쩍이는 발차기도, 화려한 공중 동작도 없었다. 그 마을 사람들이 택한 건 딱 하나였다 — 힘을 빼고 중심을 세우는 것.
태극권을 배울 때 제일 먼저 요구하는 게 '힘을 빼라'는 말이다. 운동은 힘을 줘야 하는 거 아닌가? 이를 악물고 버텨야 강해지는 거 아닌가?
그런데 태극권에서는 반대다. 턱에 힘을 빼고, 어깨 힘을 빼고, 팔의 힘까지 내려놓으라고 한다. 마치 몸속에 몰래 숨어 있던 긴장을 하나씩 색출해 추방하는 작업 같다. 그 과정에서 알게 된다. 내가 얼마나 쓸데없이 힘을 주고 살았는지.
몸에서 긴장이 빠져나가자 이번에는 생각이 모습을 드러낸다. 동작이 느리다. 너무 느려서 잡생각이 먼저 지친다.
빠르게 움직이면 생각이 따라오지 못한다. 하지만 천천히 움직이면 생각이 앞질러 간다. '이게 맞나? 지금 뭐 하는 거지?' 하며 잡념이 인다. 그러다 어느 순간 조용해진다. 몸의 감각이 더 또렷해지기 때문이다. 발바닥이 땅을 누르는 느낌, 척추가 위로 길어지는 느낌, 손끝에 실처럼 걸리는 공기의 저항.
그때 깨닫는다.
느림은 게으름이 아니라, 정밀함이라는 것을.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 인류의 오랜 꿈이다.
잘 먹고, 잘 자고, 많이 움직이면 건강은 자연히 따라온다. 그러나 우리는 그 명백한 방법이 알면서도 따라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건강하고 장수하기를 바란다.
문제는 의지가 아니라 방식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운동'이라고 하면 곧바로 격렬함을 떠올린다. 숨이 턱까지 차야 하고, 근육이 찢어질 듯 아파야 제대로 운동한 것처럼 느낀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보디빌더처럼, 격투기 선수처럼 훈련할 필요는 없다. 격렬하지도 않아도 되고, 이를 악물고 무게를 밀어 올리지 않아도 된다. 대신 천천히, 아주 천천히 몸을 움직인다.
처음에는 이게 운동이 되나? 싶다. 그런데 몇 분 지나지 않아 손끝과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힌다. 호흡이 깊어지고, 가슴이 잔잔해진다. 흩어져 있던 생각이 하나로 모인다.
그러다 문득 깨닫는다. "온전히 집중하고 있구나!"
태극권은 몸을 혹사시키지 않는다. 대신 몸을 깨운다.
억지로 밀어붙이지 않고 중심을 세운다.
동작 하나하나가 퍼즐처럼 연결되어 있어, 다음 흐름을 자연스럽게 기다리게 된다. 팔을 들어 올리면 발이 따라오고, 발이 움직이면 허리가 반응한다. 내 몸이 하나의 유기체처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된다.
건강하게 오래 살고 싶다. 그런데 막상 밖에 나가 뛰는 건 싫다.
그렇담 태극권을 배워보자. 숨 가쁜 건 부담스럽고, 고통스런 몸부림은 오래가지 못한다.
거창한 결심을 요구하지 않는다. 번듯한 장비도 필요 없다. 몸을 곧게 세워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한 동작만이라도 좋다. 발바닥에 실린 무게, 무릎의 미세한 흔들림, 허리에서 올라오는 축을 온몸으로 느껴보면 된다. 그 느낌이 의외로 재미있다.
건강은 극단에서 오지 않는다. 지속에서 온다. 태극권은 그 지속을 이어가게 해 준다.
그래서, 건강하게 오래 살고 싶은 사람에게 어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