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목표는 무엇이었지?]
이십 대를 규정짓는 이 키워드 속에서 나 역시 물 흘러가듯 목표 하나만을 위해 20대를 보냈다.
한국사회에서 삼십 대 초반의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하는 topic 중 하나는 ‘목표 없는 삶’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들어가 일을 하고 돈을 벌고 있지만 내가 원했던 삶이던가? 아님, 애초에 내가 원했던, 꿈꿨던 삶은 있었나? 나의 목표는 무엇이지? 잃어버린 목표가 내 과거와 무의식 속 어딘가에 낙오된 부표처럼 떠내려가고 있다.
대학은 우리의 성장이 아닌 직장을 위한, 점수를 얻기 위한 장소에 불과했다. 우리가 좀 더 성찰적이었거나 훌륭한 멘토가 있었더라면 삶의 여정을 좀 더 큰 그림 속에서 그려봤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소수에 해당한다.
대부분의 평범한 10대, 20대에게 성찰적인 삶은 불가능에 가깝다. 해볼 기회도 방법도 시간도 없었다. 그때는 알지 못했다. 아니, 알 수가 없었다.
우리의 학교는 불행하게도 자신이 누구인지 깨닫게 도와주지 않는다. 한 번뿐인 인생의 여정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대신 개인은 없고 규칙과 규범들, 순종적이 되길 원하는 사회구조가 존재한다. 물론 그 속에서 어떤 교사를 만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학교는 그러하다. 이점이 내가 교사가 되고 싶었던 이유다. 내가 만나보지 못했던 그런 이상적인 교사가 되고 싶었다.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또 인식하듯, 학교는 점수를 위한 경쟁의 장이 되어 버렸다. 중2병은 단순히 아이들의 잘못과 책임이 아니다. 뇌구조가 변하는 그 변혁의 시기에 학교는 아이들을 있는 그대로 존중해주지도 인정해주지도 않고 규범과 규율 속에 갇혀 버린다. 교사의 잘못이라고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교사들 역시 그러한 학교의 학생이었기 때문에 알 수가 없고, 학교 또한 교사의 변화를 이끌어주지 않는다. 내가 교사가 되고 난 후 가장 많이 느낀 것은 한국의 학교 구조라는 것이 얼마나 보수적인가 라는 점이다.(사실, 비단 한국뿐만은 아니다.)
나의 20대.
당시 나는 교사라는 꿈, 직업을 위해 나름의 노력을 했다. 안타깝게도 그것이 다였다. 나름의 노력이었지만, 참으로 좁게 공부하였다. 삶에 대한 공부가 아닌 그저 기술적 공부였다.
나름 철학을 좋아하고 책을 좋아했으나 깊이는 없었다. 하나의 책을 읽고 깊은 성찰을 해보는 토론 문화도 가져 본 적이 없고 누군가와 철학적 사유를 해본 적도 없다. 중고등학교 때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대학에 들어가 본인이 노력하고 찾아본다면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그저 적당히 친구들과 술도 마시고 적당히 공부하고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냈다. 내가 나 자신의 멘토가 되기에는 삶과 인생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나는 10대부터 나 스스로 모든 것을 선택하고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32살이 되고 돌이켜 보니 얼마나 허무하게 나의 20대를 보냈는지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과거는 돌릴 수 없다. 내가 아쉬워하고 후회해봤자 나의 20대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지만 미래는 달라질 수 있다.
기술적 공부, 깊이 없는 공부가 아니라 자신을 탐독할 수 있는 삶을 위한 공부.
얕은 공부는 시간이 갈수록 그 밑바탕이 드러나고 흔들린다.
깊은 탐색과 철학적 사유의 부재는 후에 어떤 형태로든 삶을 위태롭게 만들 수 있다.
특히나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자신의 삶을 어떻게 살고,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로드맵을 그려보고 깊은 탐색을 해볼 수 있는 기회를 가져야 한다.
학교가 변해야 되는 이유고, 기성세대 역시 계속 배움이 필요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