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과 읽기

계속되었던 가정폭력의 경험은 '자살'을 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겨우 초등학교 4학년 무렵이었다. 어린 나이였지만 삶이 쉽지 않다고, 왜 살아야 하는지가 의문이라고 계속 되뇌었다. 그 후로도 때때로 ‘그만하고(살고) 싶다’라는 생각이 불쑥불쑥 찾아온다.


죽음을 향한 감정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얇지만 절대 끊어지지 않을 것만 같은 무언가가 몸과 마음을 꽁꽁 묶어버리는 것과 같다.


이런 생각을 한다고 머리는 헝클어진 채 방에 드러누워 천장만 바라보며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니다. 겉으로는 여기저기 관심 분야가 많고 열정과 에너지가 넘쳐 보인다. 좋아하는 것도 하고 싶은 것도 많다. 말은 적지만 잘 웃고, 새로운 모임을 꾸리는 것을 좋아한다. 미술관을 사랑하고 카페에서의 독서를 좋아한다. 고등학교 때부터 아침 스트레칭을 꾸준히 해왔고 러닝, 필라테스, 요가, 수영, 바이크 등의 운동도 해왔다. 그러나 이런 행동의 원동력이 긍정의 감정을 경험하기 때문은 아니기에 이런 나의 이율배반적 모습에 의문이 늘 따라다녔다.


4년 전 미술 심리치료사 자격증을 준비하며 발견한 나의 특성은 '결핍'이었다. 피실험자의 역할을 통해 그림을 그리고 종이를 자르고 오려 붙이는 작업들에서 공통으로 발견했다. 그때야 의문이 풀렸다. 결핍을 계속 채우려는 욕구. 스스로 부족하다고 여겼기에 계속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이 존재해 온 것이었다. 물론 이런 이해가 나를 우울로부터 해방시키지는 않았다. 여전히 종종, 푹푹 꺼지는 땅을 걷는 기분이 들었고, 질퍽한 진흙탕에 빠져 허우적대면 될수록 더 깊이 빠져드는 감각을 느낀다. 끝이 보이지 않는 짙은 바다 아래로 계속 계속 가라앉는 기분은 반복되었다. 이 세상에 나 혼자뿐이라는 생각, 핸드폰 속 모든 연락처를 지우고 싶고, 모든 관계를 끊고 싶은 충동.


이십 대 초중반에는 며칠 동안 침대에 누워 괴로워하거나 울면서 지내기를 반복한 적도 있었고, 울지도 않고 출근도 하지만 '생'이 느껴지지 않는 우울의 방에 몇 날 며칠을 갇혀 지내기도 한다. 그럼에도 그때마다의 우울을 빠져나갈 수 있도록 나를 일으켜 세워준 것이 있다.


읽기란 행위이다. 우울의 바다에 허우적 대고 있어도 다행히 본능적 배움의 욕구는 존재했고 책이 이를 채웠다. 잠깐의 말뿐인 달콤한 위로가 아닌 깊은 울림, 삶의 지혜와 영감은 우울의 바다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해 주었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너무나 유명한 문구라 식상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중학교 때 데미안을 통해 나를 둘러싼 고통의 세계를 향한 투쟁의 감각을 배웠고 두 발로 나아가는 자유의지의 이미지를 마주하게 되었다. 그렇게 데미안과 함께 십 대 초반을 통과했다.


유이치는 신난다는 듯 냉장고에서 그레이프 푸르츠를 꺼내고, 주서기를 상자에서 꺼냈다. 나는 한밤의 부엌에서 끔찍한 소리를 내며 만들어지는 두 사람 분의 주스 소리를 들으며 라면을 끓였다.

십 대 후반, 스무 번은 넘게 읽은 책, [요시모토 바나나-키친]의 한 장면이다.

상실의 상처를 지니고 있는 소설 속 인물들의 말과 행동은 평행이론 속 또 다른 우주에 살고 있는 나를 만나는 것 같았다. 이 소설이 갖고 있는 우울의 차가움은 역설적으로 뜨거운 공감으로 다가왔다. 그들의 말과 행동은 금방 식어버리는 누군가의 영혼 없는 뜨뜻미지근한 잠깐의 위안이 아니었다. 언제 어느 페이지를 읽어도 위로와 위안을 찾을 수 있던 책이다.



수영을 할 때는 의식하지 않아야 몸에 힘이 빠지고 물에 뜰 수 있다. 읽는 시간만큼은 몸과 마음에 자연스레 힘이 빠져 우울의 바다에서 떠오를 수 있었다.
항우울제가 뇌의 화학적 불균형을 치료한다면 읽는 행위는 세상과 나를 바라보는 시각의 균형을 찾게 해 주고 비틀대며 넘어지는 나를 다시 일어서게 해준다.
때로는 등대가 되어 나아갈 방향을 찾아준다.
읽고 또 읽으며 상실을 채운다.

내가 책을 읽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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