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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dupreneur 크리스티나 Oct 30. 2020

음악의 치유

나의 투명망토

등하굣길 덜컹덜컹 움직이는 버스와 전철 안에서, 혼자 있는 방 안에서, 불안한 시간 속에서, 책을 읽을 때에, 공부를 할 때에도 늘 내가 있던 공간에는 음악이 함께 있었다.

어릴 적 엄마가 청소를 하며 틀어놓고는 했던 한영애의 ‘거기 누구 없소'를 들으면 집에는 꼭 다른 공기가 흐르는 것 같았다. 그의 매력적인 중저음이 온 집안의 공간을 가득 채웠다. 다섯 살 꼬마 아이는 그 노래를 좋아했다. ‘내가 있는 이 공간이 익숙한 집이 아닌 살짝은 낯선 공간으로 느껴지는 그 느낌'이 좋았다.

집에 있었던 한영애 LP

 일곱 살 때 처음으로 샀던 앨범은 서태지와 아이들 1집이다. 지금 들어도 전혀 촌스럽지 않은 음악들.

‘너에게'를 들으며 따뜻한 가사와 멜로디를 듣고 있으면 마음은 말랑말랑 톤다운된 핑크색으로 물들여지면서 솜사탕을 막 손에 쥔 아이처럼 기분이 좋아졌다.  


‘됐어 됐어 이제 됐어 이제 그런 가르침은 됐어, 매일 아침 일곱 시 삼십 분까지 우릴 조금만 교실로 몰아넣고’

[교실이데아]의 가사다.


이 가사를 들으며 “학교는 무슨 공간이지?” 란 생각을 했었고 [죽음의 늪]을 들으면서는 치명적 제목과 다르게 오히려 누군가 내게 손을 내밀어주는 것 같은 알 수 없는 위로를 받았다.



중학교는 브릿팝을, 고등학교는 ‘에픽하이', ‘다듀', ‘드렁큰타이거' 등의 힙합 음악과 클래식을 들었다. 힙합의 심장소리와 닮은 박자감을 참 좋아했다.

MP3에는 신중에 신중을 기해 선택한 음악들로 꽉꽉 눌러담아 플레이리스트를 만들었고 사용하는 이어폰의 가격도 점점 높아졌다. 언제 어디서든 이어폰만 꽂으면 외부로부터 분리되어 나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좋았다.


마음이 슬플 때는 내 마음을 알아주는 슬픈 음악이 필요했고 공부를 할 때는 클래식 (때로는 빗소리)을 들었다. 다양한 뮤지션들과 음악을 접하게 되면서 인디가수들부터 샹송, 재즈 등 내 귀에 꽂히는 음악이라면 종류를 불문하고 늘 찾아들었다. 가족이나 친구보다 더 내 마음을 잘 아는 것이 음악이었고 마음에 있어서는 어떠한 약보다 효능이 좋았다.


지금은 음악을 넘어 ‘들을 거리' 들이 도처에 널려있다. 똑똑한 스마트폰 덕에 다양한 강연과 잡다한 지식들을 쉽게 접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어폰은 여전히 내 귀에 꽂혀져 있지만 음악이 플레이 되는 대신 팟캐스트 방송, TED강연, 뉴스 등이 압도적으로 많이 재생 된다. 그 이유를 생각해 보니 ‘음악을 들을 시간에 더 많은 정보를 얻는 게 중요하겠다' 라는 인식이 시나브로 자리 잡은 것 같다. 문학작품 대신 비문학을 읽는 비율이 높아진 것 처럼 말이다. 약간은 씁쓸한 마음이 든다.


그럼에도, 일을 할 때나, 집에 혼자 있을 때에는 음악을 듣는다. 때로는 혼자 걷고 있는 길의 보이지 않는 동반자가 되어주기도 하고 때로는 부지불식간에 나를 새로운 공간으로 데려가 준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내 귀에는 에어팟이 꽂혀 있다. 나에게는 음악이 십 대, 나를 지켜주는 투명망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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