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톡은 pc로만 사용합니다.
“(카)톡 할게" 란 말이 어느새 “문자 할게"란 말을 대체한 지도 꽤 되었다. “문자 할게"란 말이 구식처럼 들릴 정도이다. 3~4년 전만 해도 처음 알게 된 사람과는 카톡보다 문자 사용이 조금 더 ‘예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핸드폰 번호를 주고받아도 문자가 아닌 카톡으로 연락이 오고, 종종 핸드폰 번호가 아닌 카카오톡 ID를 물어오기도 한다.
공과 사, 모두 카톡이 연락을 대신하고 있다. 택배나 공공기관에서 오는 알림도 카톡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새로 오픈하는 카페들도 ‘진동벨’이 아닌 ‘카톡'으로 주문한 메뉴가 준비되었음을 알려준다. 문자가 적지만 일정 금액이 소비되는 반면 카톡은 ‘와이파이’만 있으면 무료다. 대한민국에서 거의 100%로의 점유율을 보이는 만큼 카카오톡은 대한민국 대표 ‘메신저'가 되었다.
카카오톡은 더 이상 단순한 메신저가 아니다. ‘카카오 메이커스’에서는 이곳에서만 구입할 수 있거나 혜택을 주는 물건, 서비스 등을 사고 ‘선물하기'를 통해 만나지 못하는 지인의 생일에도 몇 번의 터치로 간편히 선물을 보낼 수 있다. 카카오 채널에는 다양한 기사들과 브런치와 같은 글들도 볼 수 있다.
그룹톡에서는 실시간 채팅처럼 메시지를 주고받고, 오픈 챗방에서도 익명으로 다양한 커뮤니티와의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 이러한 편의에 묻혀 하루 중 상당 시간을 ‘카카오톡’에 내어주고 있음을 발견했다. 실시간 채팅처럼 끊이지 않는 메시지, 자꾸만 울리는 알림의 ‘자극'으로 무의식적으로 핸드폰으로 손을 뻗게 되고 메시지가 오지 않아도 습관성 ‘카톡'을 누르고 이것저것 확인한다.
어느 날, 그런 내 모습이 싫었다. 내 금쪽같은 시간이 의미 없이 쓰이고 있음을 발견했다.
왜 내가 몰라도 되는 기사나 글들을 나도 모르게 읽고 있는 걸까? 왜 당장 필요도 없는 물건들을 끝없이 스크롤하고 있는 거지? 지금 이 대화는 꼭 지금 하지 않아도 되는 건데. 일을 할 때도 초와 분단위로 집중이 끊어지고 있었다. 단순해 보였던 카카오톡은 이제 자극적 신호들로 가득해졌다.
자극적인 모든 신호를 한 번에 차단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카카오톡 앱을 꾸욱 눌러 ‘어플 삭제'하기
1년 전쯤에도 몇 주간 카카오톡 어플을 삭제한 적이 있었다. 오래가지 못했다. 급히 확인해야 하는 메시지들은 물론 공적 모임에서도 카카오톡으로 공지가 되어 확인을 못하는 상황들이 발생을 했다. 어쩔 수 없이 다시 앱을 깔았고 예전과 같은 시간의 소비를 하게 되었다. 이제 삶에서 카카오톡을 아예 사용하지 않는 것은 거의 불가능 해졌다. 공식적 내용이나 각종 알림도 카톡으로 오고, 여러 모임들의 의사소통, 직업상 학생들과도 단체톡으로 여러 내용을 주고받아야 한다.
그러다 2-3개월 전쯤 다시 카톡 어플을 삭제했다. pc로만 카카오톡을 사용한다. 학생들에게는 급한일은 문자, 전화를 부탁했다. 그 외에는 확인을 늦게 하더라도 큰일이 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메시지를 보낸 상대는 불편할 수 있지만 (늦더라도 답은 꼭 한다!) 그만큼 나는 자유로워졌다. 별 내용 없는 단체 메시지를 확인하느라 집중을 잃는 일도 줄어들었고 카카오톡이 제공하는 재미와 편리에 빠져 내 시간을 ‘낭비’하는 일도 줄었다. 가끔씩 필요한 순간에 카카오톡 앱을 깔아 일을 처리하고 다시 삭제한다. (카카오 메이커스나 선물하기에서 카카오페이를 사용하려면 카카오톡이 설치되어 있어야 한다. 또 chatroom에서 투표하기 기능을 만들려면 역시 핸드폰 어플이 필요하다.) 번거롭기는 하지만 감수하기로 했다.
남자친구와는 WhatsApp을 사용한다. 한국에서는 잘 쓰지 않는 메신저 앱이지만 외국 업무를 하는 남자친구가 업무용으로 사용하는 메신저라 나에게는 적합한 선택이었다.
하루에도 너무 많은 자극과 관계에 피곤하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쉼, 이 필요하다.
한병철의 <피로사회>에서 멀티태스킹은 문명의 진보가 아닌 퇴화라고 지적한다.
정보의 범람에서 나를 조금 떼어내는 일. 어플 하나를 꾸욱 눌러 삭제하는 일부터 시작했다.
세상이 내게 조바심을 요구하는 만큼 나는 조금씩 조금씩 더 느리게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