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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비 May 17. 2023

이케아의 도시에 사는 남자

묻지도 않은 정체를 밝히고 말았다

우연히 발견한 곳이었다. 언니 따라 왕자 데리고 경동시장 안에 있다는 스타벅스에 가고 있었는데, 계단만 올라가면 스타벅스가 나올 줄 알았더니 금성전파사라는, 이름은 레트로 감성을 노린 뜻밖의 공간이 나타났다. 늘 마케팅이 아쉬운 LG에서 또 비밀리에 이런 데를 만들었구나 싶었다. (미안해요, 엘지!)


식물재배기 ‘틔운'으로 키운 메리골드를 심은 왕자가 맛있는 걸 먹겠다고 언니랑 먼저 스타벅스에 가 있으려는 사이 내 발은 뭔가에 홀린 듯 안마의자가 있는 곳으로 들어갔다.


뜻밖에도 공주 또래의 여자아이가 누워 있었다. 전날 호르몬의 노비 이틀째인 몸으로 아이들과 롤러장에 다녀온 내 고단한 몸뚱이. 코너 담당자님께 저 아이가 하는 코스는 언제쯤 끝날 것 같은지 작은 목소리로 물었고, 질문의 의도를 파악한 담당자님은 웃으며 잘 모르겠다 하시고는 나에게 되물었다.


“피곤하신가 봐요.”

“현대인의 피로죠.”


좋아하는 주접을 떨고서 콧바람까지 뿜으며 웃고 기다리니 이윽고 아이가 의자에서 내려왔다. 반가운 마음으로 외투와 신발을 막 벗는데 어머나, 건조기에서 대충 꺼내 신고 나온 공주의 알록달록 양말이 까꽁 하고 모습을 드러냈다. 그제서야 누가 봐도 그지꼴인 행색을 깨닫고 순식간에 아주 부끄러워졌다. 또 쓸데없는 소리를 했다.


“중년의 피로란, 제가 몰골이 참.”


담당자님은 아니라며 예쁘시다고 했다.


별 뜻 없는 고운 말에 빚쟁이가 된 마음으로 직장인 코스에다 온열 기능까지 추가해서 안마기에 몸을 맡겼다. 무드업냉장고와 틔운을 구경하러 사람들이 더 들어왔지만, 담당자님은 나더러 괜찮다며 계속 누워 쉬시라고 배려해 주셨다.


쌩 그지꼴이어도 양심은 있는지라 적당한 때를 봐서 널브러져 있던 몸을 일으켰다. 너무 피곤했는데 덕분에 잘 쉬었다고 했더니 담당자님이 많이 피곤하셨나 보다 하며, 아이 키우는 게 피곤하죠, 그러셨다.


대체 그때 내가 왜 그랬는지, 무슨 생각이었는지 지금도 잘은 모르겠다. 언젠가 친구가 나를 '적확한 말로 표현하기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했었는데 아마 담당자님의 말이 내 피곤함에 대한 ‘적확한 답'이 아니었기 때문이지 싶다. 왜 이렇게 피곤한지, 왜 이렇게 그지꼴인지 변명이 하고 싶었던 것도 같다.


"선생님, 제가 왜 피곤하냐면요, 근데 제가 여태 아무한테도 이런 적이 없어서 좀 그렇긴 한데, 혹시 브런치라고 아세요?"

"네, 알죠, 브런치."

"먹는 거 말고요."

"네, 브런치, 카카오에 있는 거."


아는 사람이 있구나 싶었다. (미안해요 브런치!)


"제가 브런치를 하는데요, 김도비라고 있거든요, 거기 제가 왜 피곤한지 나와요."

"네, 이따 제가 시간 될 때 한번 보겠습니다."


사람 좋은 미소로 대답한 담당자님을 뒤로하고 호다닥 자리를 빠져나와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마시고 왕자가 하고 싶어 했던 철권도 시켜줬다. 그 사이 언니는 옆에 있던 프로그램도 예약했는지 나더러 공주 줄 팔찌 하나 만들면 좋겠다고 했다.


친구들이랑 찜질방 가느라 같이 못 온 공주를 위한 좋은 선물이 될 것 같아 알겠다며 안내를 받았다. 그런데 세상에, 아까 그 안마기 코너 담당자님이 이번엔 팔찌 코너에 와 있는 게 아닌가. 다신 안 볼 사람인 줄 알았는데 아뿔싸.


낯선 사람과도 눈인사를 잘해서 한국 엄마들이 신기해했던 나인데 팔찌 끈 고르고 가위질하는 내내 담당자님 얼굴을 쳐다볼 수 없었다. 열심히 설명해 주시는데 눈을 자꾸 피하려니 어쩐지 무례한 것 같아 죄송하기까지 했다. 결국 변명을 했다. 안 하던 짓을 했더니 내가 도저히 못 쳐다보겠다고.


“제가 좀 잘생기기는 했죠.”

(응??? 저기요???)


실은 이미 검색을 했는데 웨딩드레스 사진이 나오더란다. 아마 다른 걸 보신 것 같다고, 그냥 보지 마시라, 나는 집에 가면 오랜만에 이불킥을 할 것 같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담당자님이 다시 내 이름을 물었고, 주책바가지 아줌마는 넙죽 대답을 하고서는 에라이 나도 모르겠다 그랬더니 나더러 어디 사시냔다. 자신은 광명에 산다고.


오오- 이케아의 도시네요. KTX도 있고.

담당자님이 웃으셨다. 매일 멀리 출근하는 건 오늘까지라고, 자기가 다시 찾아본 뒤 여기 일하던 사람이라고 댓글 남기겠다길래 그건 안 된다고 말했다. 사파리에서 방금 탈출한 야생의 얼굴에다 삼일 째 감지 않은 머리는 꾀죄죄했고, 호르몬의 노비라서 대충 주워 입은 까만 바지와 겨울 외투가 누추한 몰골에 민망함을 더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같이 못 온 공주 몫으로 한 개씩 더 챙겨주신 와펜과 스티커를 손에 들고, 누추한 고객을 친절하게 응대해 준 담당자님께 감사하다 인사하며 나갈 채비를 했다. 담당자님은 내가 전혀 그지꼴이 아니며 아까도 말했지만 예쁘시다고 덕분에 자기가 행복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도비는 박색인 걸???) 거짓이었지만 듣기는 좋았던 담당자님 말에 이런 일이 되게 천직인 분이구나 생각했다.


곧 마흔 살 아줌마가 되고 나니 조금만 빈말을 들어도 기분이 좋아진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더니, 과연 고래보다 한참 작은 도비는 어울리지 않는 칭찬에도 신이 나서 여태 마음이 덩실댄다. (갱년기라도 오는 걸까.)


저번에 입대 앞둔 스무 살 사촌을 봤을 때는 청년의 젊음이 부러워 눈물이 다 날 것 같았는데, 정말이지 도비의 미래보다 백 배는 더 밝은 앞날이 기다리고 있을 상냥한 젊은이의 마음씨에 나는 최신 안마기로도 제대로 수습할 수 없던 피로가 다 가시는 것 같았다.



언제나 오늘의 주접왕인 도비 아줌마의 아주 사소하고도 삶을 풍요롭게 하는 취향:

그지꼴일 때 듣는 예쁘다는 빈말과 그지꼴인 것도 잊고 웃음 짓게 하는 상냥함.



최근에 들은 기분 좋은 말 있으실까요?

저는 요즘 로또라도 사야 하나 싶어요. 아… 복권에 필요한 운을 빈말에 다 써서 안 되려나.......


마침내 영접한 "크림 만땅" 말차 프라푸치노. 가끔 먹으면 기분이 좋아지는 너무 달지 않고 시원한 상냥한 맛.  




(사진=상냥한 말보다 조금 덜 개운했던 엘지 힐링미 안마의자와 영원히 안마의자를 가까이하게 만드는 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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