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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비 Jul 18. 2023

틀니 껴도 사 먹고 싶은 단 하나의 발사믹 식초

벌서 몇 병을 사 먹었나 모른다.

누구나 그런 경험이 있다. '아, 겪기 전으로 돌아갈 순 없어.' 싶은 일생일대의 경험 말이다. 내 경우 가장 최근에는 이혼이 그랬다. 지난 삶을 조금 객관적으로 바라볼 줄 알게 되고 나를 좀먹던 결혼 생활에서 벗어나기로 결심할 때 나의 우주는 전복되었다. 그리고 나는 직감했다. 이제 이혼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겠구나.


음식도 그렇다. 떡튀순을 경험해 본 사람이 그다음엔 떡볶이만 단품으로 주문할 수 있겠는가. 어림도 없다. 잘 로스팅된 원두를 갈아 핸드드립을 내리면서 초코 머핀처럼 부풀어 오르는 커피를 눈과 코로도 음미하는 행복을 아는 사람이 과연 부풀어 오를 기미라고는 없는 죽은 분쇄 원두로 내린 커피를 즐겁게 마실 수 있을까. 팥으로 메주를 쑤는 게 더 빠를 거다.  


거창하게 말했지만 오늘의 주인공은 벼르고 별렀던 발사믹 식초. 우리가 외국 살 때부터 먹은 것까지 치면 족히 열 병은 먹은 것 같다. 최근 일 년 반 남짓한 기간 동안에만 세 병을 먹었고, 가족과 친구는 물론, 직장에도 선물하였으니 내가 이 발사믹 식초를 얼마나 좋아하는지는 더 설명하지 않아도 될 터.


그래서 내 마음을 사로잡은 이 사랑스러운 아이의 이름은?


두에비토리에 발사믹 식초.


그래서 극강의 가성비를 자랑하는 이 아이의 가격은?


현재 인터넷 최저가로는 250ml짜리 한 병에 21500원. 

백화점 식품관에서도 봤는데 나는 직구를 하거나 아무 최저가 사이트에서 사 먹는 중이다.


그래서 도무지 끊거나 갈아탈 수 없는 이 아이의 맛은?


자꾸만 맛있는 빵이 사고 싶어지고 샐러드를 찾게 되는 대단히 상냥한 맛. 


좋은 맛이 나는 빵을 사러 굳이 멀리 있는 베이커리까지 가고 싶어지는 맛이다. 올리브유와 발사믹 식초에 살짝 적신 고소한 빵을 한 입 먹은 뒤 얇은 신맛이 도는 쌉쏘름한 커피까지 한 입 마시면 그 두 입을 무한 반복하고 싶어진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인근에 만족스러운 빵집이 있어 나는 종종 행복하다. (근데 삼립에서 나온 통밀식빵을 새벽에 배송받아 토스트 해 먹어도 아주 맛탱구리 아침식사가 되는 매직.)


여느 다른 사람들처럼 내가 좋아하는 것에도 사연이 있다. 유명한 P사에서 나온 발사믹 식초가 저렴하길래 사 먹었다가 재구매란 없다며 모질게 결심했더랬다. 일부러 브로콜리에 시럽 섞어 비빈 걸 오븐에 구워 부지런히 먹어치우던 차, 이탈리아 다녀온 지인 집에서 샐러드를 먹었는데 심청 아버지 개안하듯 눈이 띠용 하고 튀어나올 뻔했지 뭔가.


그게 이 두에비토리에 발사믹 식초였다. 글레이즈스러운 점도가 아주 인상적이었는데 적당히 달달하면서 산도가 제법 있어 먹으면 먹을수록 속이 개운해지는 바람에 샐러드를 코끼리처럼 먹고 말았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나는 다른 발사믹 식초를 사 본 적이 없다.


가끔 그런 생각을 했다. 2만 원, 3만 원만 줘도 이렇게 맛있는 발사믹 식초를 먹을 수 있는데 같은 브랜드에서 나온 15년산, 30년산 발사믹 식초는 을매나 맛있을까, 하는. 지금 먹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럽지만 혹시 모른다. 15년산 두에비토리에 발사믹 식초를 먹고 나면 또 눈알이 띠용 해서 '이제 이걸 먹기 전으론 돌아갈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될지도. 그래서 안 사 먹는다.

 

아직 안 경험해 보셨다면 한 번 주문해 보시라.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거나 맛있다고 하는 사람은 아닌데, 정말 괜찮다.




말이 많은 여자의 여담


파파디파스타라고 슬쩍 들르기 좋은 아담한 레스토랑이 있는데 셰프 겸 사장님이 왕 친절하고 음식도 퍽 맛있다. 1분에 1만 원을 벌던 여자랑 오픈 때부터 단골이라 공주 향한 셰프님의 스윗함을 끼얹은 젤라또도 한두 스쿱씩 선물 받았던 그곳은 왕자 출산 8일 만에 꽃샘추위를 뚫고 친정 엄마와도 간 곳이다. (그만큼 좋았다는 뜻.) 도비네 공주가 생애 첫 "발따믹 또뜨"를 먹고 푹 빠졌던 그 식당 덕분에 우리집은 지금까지 발사믹 사랑을 이어간다. 나는 이 발사믹 식초를 틀니 낄 때까지 계속 사 먹을 참이다.


쓸데없이 비장하고 늠름한 이 사진의 출처는 이탈리아 두에비토리에 공식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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