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서 몇 병을 사 먹었나 모른다.
누구나 그런 경험이 있다. '아, 겪기 전으로 돌아갈 순 없어.' 싶은 일생일대의 경험 말이다. 내 경우 가장 최근에는 이혼이 그랬다. 지난 삶을 조금 객관적으로 바라볼 줄 알게 되고 나를 좀먹던 결혼 생활에서 벗어나기로 결심할 때 나의 우주는 전복되었다. 그리고 나는 직감했다. 이제 이혼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겠구나.
음식도 그렇다. 떡튀순을 경험해 본 사람이 그다음엔 떡볶이만 단품으로 주문할 수 있겠는가. 어림도 없다. 잘 로스팅된 원두를 갈아 핸드드립을 내리면서 초코 머핀처럼 부풀어 오르는 커피를 눈과 코로도 음미하는 행복을 아는 사람이 과연 부풀어 오를 기미라고는 없는 죽은 분쇄 원두로 내린 커피를 즐겁게 마실 수 있을까. 팥으로 메주를 쑤는 게 더 빠를 거다.
거창하게 말했지만 오늘의 주인공은 벼르고 별렀던 발사믹 식초. 우리가 외국 살 때부터 먹은 것까지 치면 족히 열 병은 먹은 것 같다. 최근 일 년 반 남짓한 기간 동안에만 세 병을 먹었고, 가족과 친구는 물론, 직장에도 선물하였으니 내가 이 발사믹 식초를 얼마나 좋아하는지는 더 설명하지 않아도 될 터.
그래서 내 마음을 사로잡은 이 사랑스러운 아이의 이름은?
그래서 극강의 가성비를 자랑하는 이 아이의 가격은?
백화점 식품관에서도 봤는데 나는 직구를 하거나 아무 최저가 사이트에서 사 먹는 중이다.
그래서 도무지 끊거나 갈아탈 수 없는 이 아이의 맛은?
좋은 맛이 나는 빵을 사러 굳이 멀리 있는 베이커리까지 가고 싶어지는 맛이다. 올리브유와 발사믹 식초에 살짝 적신 고소한 빵을 한 입 먹은 뒤 얇은 신맛이 도는 쌉쏘름한 커피까지 한 입 마시면 그 두 입을 무한 반복하고 싶어진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인근에 만족스러운 빵집이 있어 나는 종종 행복하다. (근데 삼립에서 나온 통밀식빵을 새벽에 배송받아 토스트 해 먹어도 아주 맛탱구리 아침식사가 되는 매직.)
여느 다른 사람들처럼 내가 좋아하는 것에도 사연이 있다. 유명한 P사에서 나온 발사믹 식초가 저렴하길래 사 먹었다가 재구매란 없다며 모질게 결심했더랬다. 일부러 브로콜리에 시럽 섞어 비빈 걸 오븐에 구워 부지런히 먹어치우던 차, 이탈리아 다녀온 지인 집에서 샐러드를 먹었는데 심청 아버지 개안하듯 눈이 띠용 하고 튀어나올 뻔했지 뭔가.
그게 이 두에비토리에 발사믹 식초였다. 글레이즈스러운 점도가 아주 인상적이었는데 적당히 달달하면서 산도가 제법 있어 먹으면 먹을수록 속이 개운해지는 바람에 샐러드를 코끼리처럼 먹고 말았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나는 다른 발사믹 식초를 사 본 적이 없다.
가끔 그런 생각을 했다. 2만 원, 3만 원만 줘도 이렇게 맛있는 발사믹 식초를 먹을 수 있는데 같은 브랜드에서 나온 15년산, 30년산 발사믹 식초는 을매나 맛있을까, 하는. 지금 먹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럽지만 혹시 모른다. 15년산 두에비토리에 발사믹 식초를 먹고 나면 또 눈알이 띠용 해서 '이제 이걸 먹기 전으론 돌아갈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될지도. 그래서 안 사 먹는다.
아직 안 경험해 보셨다면 한 번 주문해 보시라.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거나 맛있다고 하는 사람은 아닌데, 정말 괜찮다.
파파디파스타라고 슬쩍 들르기 좋은 아담한 레스토랑이 있는데 셰프 겸 사장님이 왕 친절하고 음식도 퍽 맛있다. 1분에 1만 원을 벌던 여자랑 오픈 때부터 단골이라 공주 향한 셰프님의 스윗함을 끼얹은 젤라또도 한두 스쿱씩 선물 받았던 그곳은 왕자 출산 8일 만에 꽃샘추위를 뚫고 친정 엄마와도 간 곳이다. (그만큼 좋았다는 뜻.) 도비네 공주가 생애 첫 "발따믹 또뜨"를 먹고 푹 빠졌던 그 식당 덕분에 우리집은 지금까지 발사믹 사랑을 이어간다. 나는 이 발사믹 식초를 틀니 낄 때까지 계속 사 먹을 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