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도비 May 11. 2023

내 취향은 세일이라

우리를 울고 웃게 하는 취향에 대하여

1. 취향이 세일인 여자


1분에 1만원을 벌 줄 아는 여자가 언젠가 복지 포인트를 써야 한다고 링크를 보내왔다. 맘에 드는 걸 얘기하하기에 그릇 세트 하나를 골라서 보냈고 이게 제일 맘에 드냐고 묻는 여자에게 나는 이렇게 답장했다.


내 취향은 세일이라

그냥 할인율 높은 것 중 무난한 걸 골랐을 뿐. 우연처럼 그 말을 한 후로는 뭘 골라야 하는 순간이 올 때 종종 그런 말을 했다. 나는 취향이 세일인 여자라.


이 말이 얼마나 슬픈 말이지 겪어 본 사람들은 안다. 20대의 첫 절반은 공부에 썼고(푼순이 소리를 듣지만 공부는 괜찮게 했다), 뒷 절반은 남편 학바라지에 썼다. 스물아홉 살에 첫 출산을 하지 않았더면 활발히 취향을 발견했을 나의 30대는 (아 갑자기 눙물이) 남편과 아이들의 취향에 주의를 기울이며 보냈다.


나만의 취향 따위 없이 흑백처럼 살았다고 하기에는 삶에 즐거운 순간들도 제법 많았다. 아무것도 아닌 일에 아이가 꺄르르 웃기만 해도 애미의 삶은 FullHD OLED 테레비만큼이나 밝고 환한 빛으로 가득 차니까. 그렇게 남편 뒷바라지와 아이 미소가 취향인 여자로, 주변의 기대가 빚은 취향에 충실하게 한참 살다 서른 중반을 맞았다. 절망에 빠진 걸 깨달은 것도 그즈음이었다.



2. 영혼의 닭고기 수프 말고, 나만의 취향


손 많이 가는 남자였던 남편 말고, 손도 많이 가고 목소리도 가게 하던 아이들 말고, 삶에 지친 나의 취향을 발견해야 하는 순간이 왔다. 내가 좋아하는 곡, 내가 좋아하는 공간, 내가 좋아하는 커피와 차, 내가 좋아하는 읽기와 쓰기. 도스토예프스키가 그랬던가,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한다고. 도비는 말한다, 취향이 나를 구원한다고.


방금 스쳐 지나간 사람의 손을 뒤돌아 쳐다볼 만큼 향이 좋은 달의 둥지 커피, 신보가 나오길 친구와 함께 기다렸다가 감상하곤 했던 성시경의 노래, 감자 전분과 옥수수 전분을 비밀스러운 비율로 섞어 튀긴 닭넓적다리살 강정, 어느 나라 어느 도시에서 살든 제일 먼저 찾아가곤 하는 로컬 도서관 어린이 열람실.

 

남편과 커피 한 잔 놓고 나누는 담소가 가장 중요한 취향이라 수 년째 아무리 채워보려 해도 자꾸만 비어가던 마음을 어떻게든 달래고자, 나는 일기조차 쓸 수 없던 순간 조깅을 했고, 음악을 들었고, 자전거를 탔다. 슬픈 나를 웃게 한 건 아이들의 뻘짓과 때때로 친구들이 선물한 깻잎과 꽃다발, 이따금 들어오던 꽁돈이었다.

애들 아빠가 물려준 아이패드, 집 근처에서 중고로 산 자전거, 동생이 준 백팩, 그리고 내가 좋아한 숲.


 3. 취향, 그 사소하고도 풍요로운


어떤 취향은 분명 큰돈이 든다. 어떤 가구와 가전으로 집을 채울지, 어떤 가방으로 드레스룸을 채울지 따위는 지금 내 현실과는 거리가 있다. 당장 내일의 식비를 걱정하며 사는 사람이라면 도비의 작고 소중한 취향이 한가로운 여자의 잡소리처럼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대체로 취향이란 한 끗 차이를 확대해 주는 돋보기 같은 것이다. 대충 끓여 먹어도 되는 콩나물국에 무를 채 썰어 넣으면 맛이 조금 더 시원해지는 것처럼, 옷의 로고 크기나 위치가 구매 여부를 결정 짓기도 하는 것처럼, 어떤 취향은 딱히 많은 돈이 들지 않는다.


몸과 마음을 회복하면 앞으로 밥벌이에 좀 더 박차를 가해 볼까 싶은 이유도 이런 취향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사소하지만 삶을 풍요롭게 하는 취향들. 세일하지 않는 장난감을 아이에게 사 주고, 세일하지 않는 옷도 팡팡 사 입힐 수 있고 싶은 엄마는 오늘도 돈 안 되는 글을 쓴 뒤 돈을 벌러 나간다. 엄마 때문에 짜부라진 꼬마들의 삶을 치유하는 것도 그들의 작고 소중한 취향일 테니.


그러니 소중한 사람에게 물어 보자, 요즘 당신을 행복하게 하는 건 무엇이냐고.


나한테는 안 물으셔도 된다. 우울의 늪에서 헤엄쳐 나온 나는 이제 나를 행복하게 했거나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들을 써 나갈 예정이다. 이를 테면:

- 직원 모두가 내 이혼을 아는 카페 (세상에 뭐 이런 카페가 다 있다. 심지어 내가 말한 것도 아님 주의)

- 이케아의 도시에 사는 남자 (남자 취향 아님 주의)

- 죽을 때까지 먹고 싶은 단 하나의 발사믹 식초 (광고 아님 주의)


벌써부터 귀에서 피가 날 것 같다면, 제대로 보셨다.




에필로그_취향이 낳은 진상 


"그린티라떼 따뜻한 거 한 잔 맞으실까요? 바코드 찍어 주세요."


바코드 스캐너에다 손을 갖다 대며 직원이 말했고, 나는 휴대폰을 스캐너로 가져가며 대답했다.


"네, 그리고 우유 좀 뜨겁게 부탁드릴게요."

"우유 뜨겁게요?"

"네, 바글바글 끓여서 해 주세요. 바글바글이요ㅎㅎ"


뜨뜻미지근한 그린티라떼를 한 모금 마시고 크게 상심한 적 있었던 도비의 필살 라떼 주문법. 세일이 영원한 취향인 도비에게는 듣는 이들을 잠시나마 웃게 하는 진상스런 취향도 있다.



 *사진은 그 옛날 엄마가 로보카 폴리를 안 사 줘서 구슬펐던 왕자. 참고로 왕자의 취향도 매일 진화 중.


 

매거진의 이전글 혹시 디지털 약자세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