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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비 Jul 16. 2023

난 외로울 때 한문철 TV를 봐

아이들이 없는 주말, 엄마는 적막을 깨려 운전 공부를 합니다

우리 아빠는 만성 안전염려증이 있다. 아빠가 아빠가 된 뒤 아기가 처음으로 주변 사물을 잡고 일어서기 시작했을 때, 가구점에서 좌탁을 사며 안전성을 확인하기 위해 직접 탁자에 올라가 발을 굴러 보았다고도 하니 그 안전염려증의 진상스러움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으리라.


딸이 자라고 자라 의젓한 운전자가 되었음에도 아빠는 여전히 내가 아빠의 동승자로 차에서 내릴 때면 잊지 않고 잔소리를 한다. 뒤에 오토바이 같은 거 오는지 잘 보고 내려라. 그런 귀찮은 잔소리가 '잃기 싫은 마음'인 줄은 나이가 들고서도 한참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잔소리는 뜻밖에도 실제로 유용했다. 갓길에 선 차는 문이 갑자기 열릴 수 있으니 조심, 주차장에서는 차가 갑자기 후진할 수도 있으니 조심.


아이들을 태우고 운전을 하면서 알았는데, 우습게도 우리 아빠가 했던 거랑 똑같은 잔소리를 내가 아이들에게 하고 있더라. (열 살 공주와 일곱 살 왕자는 아직 카시트를 쓴다. 법은 만 6세까지만 카시트 의무 사용을 규정하지만, 신장 145cm나 연령 12세까지는 카시트 사용을 권장한다.) Why책은 안 읽은 아이들에게 후진등이나 마주 오는 차의 좌우 깜빡이 살피는 법은 때마다 알려 주었다.


어쩌면 운전연수 이후 막 도로에 처음 나가던 시절 추천받아 접한 한문철 변호사의 잔소리에서 나는 약간의 지식과 더불어, 부성애까지는 아니지만 메말라가는 인류애 정도를 발견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한동안 잊고 살다가도 어쩐지 책이나 넷플릭스가 보기 싫은, 아이들이 아빠집 간 사이 찾아온 적막함을 따라 울적함도 현관 앞에서 서성이는 듯한 날이면 나는 한문철 TV를 튼다.


오늘도 그랬다. 아무리 가족이라지만 언니네 집에 매번 격주로 가기도 미안해서 이번 주말에는 볼일 하나만 보고서 집에 계속 있는 중이다. 어제 약속 마치고 집에 들어와 저녁 먹으며 넷플리스 시리즈 하나를 완주했는데 오늘은 어쩐지 넷플릭스가 싫고, 귀여운 푸바오도 사골처럼 우려먹었고, 세탁할 이불이며, 쌓아놓은 그릇이며, 애들 드러운 책상까지, 하나씩 처리하는 동안 뭔가 실용적으로 시간을 보내고자 한문철 TV를 틀었다.


아이 둘 데리고 단거리, 장거리 운전을 다 하는 쫄보 싱글맘에게 큰 도움이 되는 채널이다. 아이들이 괜히 자동차를 너무 무섭게 생각할까 봐서 애들 없을 때 보면 더 좋은 것 같다. 골목길 다닐 때, 고속도로 다닐 때, 익숙해졌다고 방심하지 말고 언제나 딴에는 조심조심 운전한다. 애들 태우고 운전하다 불상의 이유로 브레이크에서 발이 떨어지며 멍청한 과실 100 사고를 낸 적 있는 나 자신. 그 이후로는 늘 더 조심하려 한다.  


가까운 지인이 대인보상 담당자라서 본인의 이해관계와 아무 상관없이 운전자 보험의 중요성을 나에게 역설한 적 있다. 교통사고란 교통사고는 다 보고 다니는 직업이니만큼 웬만하면 보상 범위 제일 큰 걸로 들으라는 추천이 충분히 이해가 되었고, 그 덕에 쫄보는 돈으로 내 마음의 평화를 사서 운전을 잘 하고 다닌다.


잘 든 보험은 꽤나 든든하다. 결혼은 왜 보험이 없을까. 이렇게 될 줄 알았더면, 내가 열심히 들어놓고 파탄이 난 뒤에도 조금 더 마음 편히 싱글맘으로 살 수 있었을 텐데. 정말 꿈에도 몰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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