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어프라이어 작동만 엄마에게 외주를 맡김
아이들이 『흔한남매』에 빠진 지는 꽤 되었다. 친구네서 전집을 선물 받아 탐독하던 차, 공주의 요청으로 신간도 구매했는데 하얀 피부 외에도 아빠를 닮은 점이 또 있는 건지 이놈의 왕자는 자기가 마무리하고 싶은 책이 있으면 아무리 말리고 혼낸들 밤 12시까지도 안 자고 책을 본다.
어제 꽂힌 것은 바로 그 13권에 나오는 "햄 통구이". 자기 전에 집에 통조림 햄 있냐고 물을 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오늘 아침 캐리비안베이로 떠나는 공주를 태권도장에 데려다 주고 오니 자고 일어난 왕자가 스팸(그것도 제일 큰 거 한 통)을 귀신같이 찾아서 식탁 위에 레시피북과 함께 셋팅을 해 놓았다.
우리밀 통밀가루 넣어 어젯밤 미리 만들어 둔 팬케이크 반죽을 구워 놓고 나갔는데 엄마의 정성은 거들떠만 보고 본인은 아침으로 스팸 통구이를 해 먹겠단다. 이노무싀킈. 어쩌겠나. 어제 갑자기 열이 나서 밥도 거의 못 먹더니 컨디션이 좋아져서 오늘은 저러고 설칠 힘도 나는구나 하고 기특하게 생각해야지.
아침은 좀 그렇고 저녁으로 먹자고 꼬드긴 후에 이모 만나 밥을 먹고, 포켓몬 가오레 게임도 하고, 분명 세상에서 제일 행복하다고 했었는데 슈퍼윙스 영화 끝난 뒤 호기랑 아리가 등장한 무대인사에서 선물을 못 받는 바람에 그만 빈정이 상하고 말았다. 집에 오는 내내 흐느끼다 잠들더니 일어나서 또 슬퍼진 일곱 살 꼬마.
아침에 못 한 스팸 요리를 하라고 뜨거운 물에 데친 스팸을 건넸더니 슬픔을 잊은 채 혼자 칼집도 내고 치즈도 찢어서 끼우고는 다 됐다며 에어프라이어에 굽는 것만 엄마가 도와 달란다. 미리 좀 데쳤으니 170도에 10분을 구웠고, 물놀이하고 돌아온 공주를 데리고 와 동생이 만든 요리로 함께 저녁을 먹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제 아침은 오랜만에 열 살 공주가 구운 팬케이크였고, 오늘 저녁은 일곱 살 왕자가 최초로 만든 스팸 통구이. 놀고 들어와 모처럼 흰쌀밥—이라고 쓰고 햇반이라고 읽는다—과 함께 먹으니 아주 꿀맛이다.
그래도 양심이 있어 소스는 없이 먹었다.
통스팸에 칼집을 내고 사이 사이 슬라이스 치즈를 끼운 후 에어프라이어 180도에서 10분 굽기. 모자라면
조금 더 굽자. 정신 건강에 좋은 맛이 아주 쉽게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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