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 셋, 아이 둘이 라세느 디너를 외상으로 먹은 이야기
“체크인 도와드리겠습니다. 예약하신 분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아, 김도비로 우선 확인 부탁드려요. 지인이 예약해 준 건데.”
“말씀하신 성함으로 예약 확인되셨습니다. 오늘 xx일 금요일부터 xx일 일요일까지 2박 3일이시구요.”
“네.”
“예약하신 패키지가 성인 둘, 아이 둘 레이크뷰 디럭스 트윈룸 객실과 조식 포함 패키지예요. 그리고 오늘 라세느 디너는 패키지에 포함된 건 아니고 따로 예약되신 거라서 체크아웃할 때 결제가 발생하구요.”
언니랑 애들 데리고 키자니아에 가서 놀다가 체크인하려고 호텔에 갔더니 직원분 안내가 청산유수로 쏟아졌고, 다 아는 얘기길래 말없이 가만히 잘 들었다. 예약을 해 준 지인과 두어 시간 전에도 통화하며 들었던 말이었다.
남편 곁을 떠나지 않고 지키는 게 대단해.
그러니까 한 달쯤 전이었다. 사정을 전부는 모르는 지인이 보기에도 내가 참 딱했는지 안부 전화를 하다 뜻밖의 말을 들었다. 속내를 들켜서였을까, 나도 모르게 나 정말 힘들었다고, 지금도 사실 힘들다고, 살아서 한국에 돌아오지 못할까 봐, 친정 식구들 얼굴을 다시는 못 보게 될까 봐 수없이 많은 날을 두려워 떨며 보냈다고, 그러니 살아서 돌아온 내가 너무 기특하다고 솔직하게 말을 한 것도 그 때문이었을 것 같다.
통화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지인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다. 11월 말까지 써야 하는 패키지가 있는데, 롯데호텔 객실이랑 키자니아랑 롯데월드 예약해 둔 걸 집안에 일이 생겨 못 가게 되었다고, 나한테 그걸 선물하고 싶다며 언제로 예약하면 될지 물어왔다.
지금 생각하면 있는데 못 쓰게 된 패키지가 맞는지도 잘 모르겠다. 처음에는 디너도 포함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별도로 예약을 한 것이었고, 롯데월드 패키지는 봤어도 키자니아까지 들어간 패키지는 못 본 것 같은데, 그리고 1박이라더니 며칠 뒤에 다시 전화가 와서 2박으로 예약했다고 했으니까.
누가 들으면 가족도 아닌데 왜 그걸 그냥 주는 건지 의아할 수 있겠지만 오랫동안 남들에게는 꺼내지 못할 마음을 나누며 지낸 사이라서, 어떤 마음으로 그런 선물을 하려는지 너무 잘 알아서, 그리고 공짜니까! 사양할 이유가 없었다. 고맙다고 재차 말하고서 고이 얻어 떠난 호캉스였다.
“네, 지인한테 그렇게 들었어요. 근데 디너는 체크아웃할 때 이거 예약해 준 지인 앞으로 지불 보증 되는 걸로 알고 있어요. 디너는 기존 4인 예약에서 성인 1인 추가하는 걸로 아까 라세느랑 통화해서 변경했는데, 그것도 체크아웃할 때 지불 보증 되는 걸로 아까 낮에 지인이랑 전화로 확인했구요.”
내가 말이 많았는지, 내가 하는 말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는지, 좀전의 나만큼이나 따분한 표정으로 가만히 말을 듣고 있던 직원이 눈빛으로 말을 끊고 내게 물었다.
“제가 말씀 잠깐 드려도 될까요?”
“네엡.”
“성인 두 분과 아이 둘, 이렇게 디너 네 분 예약은 퇴실 시 이태은 님(가명)께 지불 보증 된다고 코멘트가 남겨져 있습니다.”
“네, 맞아요. 그리고 성인 한 명 추가된 걸 라세느 식사권으로 지불 가능하냐고 전화로 문의드렸었는데, 아까 지인 말이, 그것도 퇴실할 때 지불 보증 되는 거라고 말하면 된대요.”
직원분이 다시 조금 믿기 힘들다는 표정으로 되물으셨고,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으니 나도 친구에게 들은 얘기를 앵무새처럼 반복할 수밖에.
“저도 아까 점심 때 성인 1명 추가 예약하면서 친구랑 통화했어요.”
“추가 인원분까지요? 그러면 성인 세 분, 아이 둘, 이렇게 모두 체크아웃 때 지불 보증으로요?”
“지불 보증 된다는 말이 다른 뜻이 아니라면 제가 알기로는요. 저도 디너 추가 예약 때문에 물어보려고 전화했다가 아까 그렇게 들었어요.”
그러니까 내가 호텔에 와서 무려 외상을 하겠다고 말을 한 거다. 이미 네 명이 외상인데 거기에 한 명을 추가하겠다고 말이다. 그러니 직원도 이 여자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 하고 의아했던 거다.
“이 부분은 제가 우선 이태은 님께 확인을 해야 할 것 같아요.”
“네. 제가 다시 전화해 볼까요?”
“아, 저희가 따로 확인해 보겠습니다.”
“넵, 알겠습니다:)”
사기꾼이라도 된 것 같았다. 내 말은 믿지 못하겠어서 직접 본인에게 확인 전화를 해 보겠다니.
나도 안다. 가족도 아닌 사이에, 한두 푼도 아닌 조식 패키지 2박에 디너 4인이 모자라 롯데월드와 키자니아까지 각각 4인 몫을 선물 받은 건 제법 특별한 일이라는 걸. 심지어 같이 키자니아에 가 준 언니가 고마워 같이 내가 따로 결제하려던 추가 성인 1인 몫도 지인이 내겠다고 했다. 그러니 직원이 이게 진짜인가 싶어 내 신용카드 하나를 등록하면서도 따로 확인 전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게 전혀 무리는 아니다.
확인해 보시라고 했다. 나의 친구인 이태은 님이 어느 회사 사모님이라고 직원분께 밝힐 필요는 없으니까. 내 친구도 패키지를 쓰기 곤란한 상황이 생겨서 나에게 양도했다고 말할 필요는 없으니까. 그렇다고 내가 고마운 마음 없이 맡긴 물건 받아오듯 선물을 받은 것도 아니니까. 늘 나의 생활을 안타깝고 대단하다고 여기던 친구가 좋은 마음으로 나를 떠올리며 숙박권을 줬다는 걸, 선물할 수 있다는 사실이 친구에게는 기쁜 일이라는 걸 나는 잘 알고 있으니까.
지인은 아이들을 더 먼저, 나는 그보다 조금 늦게 아이를 키우며 서로를 알아갔던 시간 동안 우리가 서로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일의 종류는 달랐지만, 서로 아끼고 응원하는 마음만은 한결같다는 사실을 둘 다 잘 알고 있으니까. 그리고 내가 미안해하지 않고 잘 받아들여야 친구의 마음도 더 편하고 좋다는 사실 역시도 나는 잘 알고 있으니까.
좋은 것을 많이 누리며 사는 그녀의 좋은 것들은 결혼을 통해 온 것이 있지만, 그녀를 슬프게 하는 것들도 역시나 일부는 결혼 생활에서 온다는 걸 나는 잘 알고 있다. 힘들어하는 그녀에게 나는 어느새 대나무숲이 되어 있었다. 지인 역시도 커튼 같은 내 웃음을 열면 그 뒤에 자리하고 있는 내 슬픔을 잘 알고 있다. 내 나이가 곧 마흔이고, 지인은 마흔을 진작 넘었는데, 나이 들어 이렇게 이것저것을 진정성 있게 나눌 친구 하나도 없다면 그것이야말로 헛되이 지나간 인생이지 않을까.
누군가에게는 믿기 힘든 호의가 내게는 늘 새로운 듯 새롭지 않은 소중한 사랑이고 우정이다. 나도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
체크아웃하면서 룸키를 건네자 직원분이 객실번호와 미니바 이용 여부를 확인하며 따로 결제할 것이 없는지를 물었고, 나는 제가 알기로는 없다고 대답했다.
"코멘트가 남겨진 걸로 알아요. 제 앞으로 조금 특별한 코멘트가 있죠?"
직원분이 그렇다고 했다. 그리고 아무것도 결제할 게 없다고, 주차 번호만 확인하고 가면 된다고 했다. 그리고 나는 정말 찐찐찐찐 찐으로 주말에 2박 3일을 투숙하며 많은 것을 먹고 마신 후 0원을 쓰고 나와 주차장으로 향하며 지인에게 고맙다고, 덕분에 잘 쉬고 나온다고 인사를 전했다.
호캉스 이야기 중에 이런 사연 많은 호캉스도 있다. 그러나 체크인할 때 일어난 이 작은 해프닝은 체크아웃하려고 줄 섰다가 일어난 해프닝에 비하면 몹시 작은 해프닝이니, 눈물 뚝뚝 흘리는 바람에 라운지의 남자 직원분이 누가 봐도 다급하게 뽑아온 게 틀림없는 휴지뭉치와 속 차리기에 안성맞춤인 생수 한 병을 갖다 준 이야기는 언젠가 다음 기회에 쓰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