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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비 Mar 14. 2023

여자 화장실의 마마보이

애타게 마마를 외쳤다는 그 아이.

귀국한 지 두 달이 안 되었을 때였다. 자가격리가 끝나고 친정에도 인사를 다녀온 후 첫째 입학 준비로 조금 바빴고, 시댁에서 곤욕스러운 사건도 겪은 뒤로 낮 동안은 피신 겸 밥벌이 겸 당장 등록 가능한 어린이집이 없던 왕자 육아를 겸하여 지역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던 중이었다.


평일 오전 어린이 열람실은 대체로 늘 한산해서 왕자와 나를 제외하면 거의 사서 선생님만 드나들었던 덕분에 우리는 제법 편하고 자유롭게 시간을 보냈다. 도착하면 꼬마용 그림책 코너에서 같이 대여섯 권을 골랐고, 두어 권 소리 내어 읽어준 뒤 나머지는 혼자 보게 하고서 나는 노트북을 꺼내 필요한 작업을 했다.


왕자는 사람들이 신기해하는 집중력으로 책을 보다가도 어느 순간 열람실 바닥을 굴러다니며 주머니에 넣어온 작은 장난감을 남자애들이 장난감 갖고 놀 때 곧잘 내는 그런 효과음을 내며 놀곤 했다. 그러면 때를 봤다가 이케아 드로잉 케이스를 꺼내어 맘에 드는 장면을 따라 그려 보라고 했고, 아이가 너무 힘들지 않게 시간이 잘 흘러갔다.


한국 나이로 다섯 살이었지만, 왕자는 이미 두 돌도 전부터 높은 곳에 둔 먹을 것을 잘 꺼내 먹었고 두 돌 반 때는 외투를 혼자 힘으로 입고 벗도록 교육받았으며, 네 돌쯤에는 앞뒤로 공주와 내 자전거가 지켜주는 사이에서 두발자전거 도로주행도 했다. 왕자가 꾸준히 먼저 도움을 요청하는 문제들이란 주로 장난감 뭐 사달라는 것, 음식 뭐 먹고 싶다는 것 다음으로 똥 닦아달라는 것 정도였다.

 

그러니 익숙하고 안전한 공간에서 왕자가 혼자 쉬하러 다녀오는 일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고, 그날도 쉬 마렵다며 일어나 나가는 왕자에게 나는 잘 갔다 오라 말하고는 내 일을 했다. 문득 이상하게 시간이 좀 걸린다 싶어 열람실 출입구 쪽을 바라보다 똥이라도 싸는 거 아니냐며 노트북 뚜껑을 덮는데 불쑥 사서 선생님이 들어와 열람실에 어울리지 않는 큰소리로 물으셨다.


혹시 남자아이 왕자 어머니 되세요?

어? 저예요, 대답하며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선생님 말씀이 대박이었다.


"남자아이가 여자 화장실에서 계속 '마마'를 부르더라고요. 애가 마마를 찾네요."


어머나. 종종걸음으로 서두르는데 민망한 웃음이 터졌다. 안 그래도 애가 안 오길래 막 가 보려던 참이었다고, 귀국한 지 얼마 안 되어 그런가 보다 말하고는 옆의 화장실로 뛰어가는 동안 사서 선생님이 굳이 따라오시며 설명을 이어가셨다.


"마마~~ 마마~~ 하고 소리치길래 제가 엄마 찾냐고 하니까 엄마가 여기 있다고 하더라고요."


설명이 끝나기도 전에 화장실에 도착해서 왕자, 엄마 왔어, 문 열어줄래? 하니 울음 섞인 엄마 부르는 소리와 함께 열린 문 뒤에 바지 내린 왕자가 엉거주춤 서 있었다. (이 맞았다.) 들어갈 땐 아무 소리 안 났는데 내 목소리를 듣고는 돌연 울보가 되어버린 우리 왕자. 흥미로우셨는지 사서 선생님이 또 한마디 하셨다.


"아까는 하나도 안 울고, 물어보니까 이름도 잘 말해줬는데 엄마 오니까 바로 우네요. 왕자야, 아까는 안 울었잖아~ 왕자가 아까는 안 울고 마마를 찾았는데."



Ready to Potty 사이트의 2020년 4월 3일 <What To Do When Your Child Is Crying On The Potty>에서 가져온 사진.


웃긴 일이었다. 쉬하러 갔다가 똥이 나오는 바람에 놀란 왕자는 애가 탔을 테지만 문제의 그 '마마'에게는 오래오래 기억에 남을 웃긴 사건이었다. 일 년도 더 지난 일을 왜 지금 썼냐면 나는 먼 옛날 한밤중 아기 공주가 항생제 먹고 똥 싸는 소리에 잠에서 깼던 것도 글로 남겼던 사람이고, 올해 일곱 살이 될 예정이었던 왕자는 근래 엄마를 찾지 않고 스스로 똥 닦는 일이 부쩍 늘었기 때문이다.


아직 솜씨가 야무지지는 않지만 다행히 똥이 워낙 야무질 때가 많은 편이라 혼자서도 수월하게 뒤처리를 하는 것 같다. (이런 거라도 수월해야 한다. 왕자는 어려서부터 워낙 상상을 초월하는 다채로운 사건사고가 많은 녀석이라 애미 입장에선 똥이라도 닦을 게 없는 똥으로 싸주는 게 종종 고마웠다.) 왕자는 이제 곧 쉬를 싸든 똥을 싸든 혼자서 남자 화장실을 당차게 이용할 수 있는 멋진 어린이가 되려나 보다.


언젠가 봤던 아기 안고 수유실에 들어가던 어떤 아빠만큼은 아니었지만 나는 이제 눈치 보며 여자 화장실에 남아를 데려가지 않아도 된다. 참 많이 컸다. 엄마가 부당하게 화를 내면 그러지 말라고도 하고, 부당하게 탓을 하면 그런 말 그만하라고도 말하는 똑똑이로. 그리고 엄마 신경질 내는 소리를 누나한테 똑같이 따라 할 줄 아는 밉상으로. 오늘도 나의 육아는 산으로 바다로 낭떠러지로 안드로메다로 갔다.


오조오억 개의 일화 중 화장실 일화만 백 개쯤 되는 이 왕자녀석. 변기 앞에 앉아 노는 애 = 변기에 손 넣은 애 = 변기 예쁘게 꾸미는 애.


글을 다 쓰고 이미지 작업만 남겨놨는데 왕자가 똥 쌌다며 화장실로 나를 불렀다. 애기 시절 사진 보며 다 컸다고 감상에 젖던 참인데 또 똥수발이네 하면서 수발을 들다가 왕자에게 물었다.


“왕자, 너 이거 많이 묻는 똥인 줄 알고 엄마한테 닦아달라고 한 거야?"

“어. 안 묻는 똥이면 내가 할 수 있어. 근데 많이 묻는 똥도 내가 닦아 본 적도 있어."


민망해하면서도 어딘가 당당한 그 말투가 가소롭고 기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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