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서재

by 박종호

어릴적부터 책모으기가 좋았던 터였다. 방과 후에 서점을 맴돌다 한권 한권 사 모은 책들이 한쪽 벽을 가득 채울만큼 가득이었다. 영문판 브리테니카와 동아백과사전, 일본 소설 대망 등의 전집류가 차지한 자리를 빼고도 상당한 분량의 책을 사 모았다. 스므살, 상병 때 휴가를 나오니 아버지 사업의 부도로 우리 식구는 작은 전세집으로 이사하고 둘 곳 없는 나의 책들은 온데 간데 없었다. 가난보다 실감나는 부재였다.


오랜 보람이 한 순간 사라져 버린 것이 가난 때문이란 생각에 더욱 분했지만 누구를 잡고 원망할 곳도 없었다. 풀 곳 없는 분은 오랫동안 남는 법인지 나는 다시 열심히 책을 사 모았고 그 후로 몇 번 해외를 나가 살게 되어도 가지고 있는 책들을 모두 싸 들고 다녔다.


올해 후쿠오카로 이사 오며 책장을 몇 칸 뺄 생각을 하고 가진 책들을 걸러 내어 여기저기에 기부하고 주고 또 버렸다. 시간은 갑절이 걸렸지만 다시 읽을 일 없을 외국책들, 재미가 없어 끝까지 읽지 못한 책과 다 읽고도 뭔지 모를 책들, 어느날 밥지을 뗄감이 부족하면 아궁이에 먼저 넣을 법한 책들을 책장에서 끄집어 냈다.


책장의 한 자리를 오랫동안 점유하던 책들을 꺼내는 일이 왠지 월세를 밀린 세입자를 끌어내는 매정한 집주인처럼 느껴졌지만 나의 매정함이 부족했는 지, 아직도 그 해 사라진 책들에 대한 분이 덜 풀렸던 것인지 여전히 수십 박스의 책들이 나와 함께 바다를 건너 왔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새벽, 책장 앞에 서서 역시 나를 바라보는 책들과 마주한다. 그들의 제목들과 함께 그들과 처음 만났던 기억, 들고 다녔던 장소들, 그 시절 한 장 한 장을 넘기며 무언가 얻기를 기대했던 고민의 기억들이 무리지어 지나 간다.


버리지 못하고 놓아 주지 못하고 나무 껍데기처럼 쌓아 놓고 살지만 이제는 분도 한도 잊혀져 버린, 오랜 친구처럼 나의 지난 날들을 기억해 주고 조용한 새벽에 '툭'하니 말을 건내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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