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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종호 Jun 25. 2023

라이프오브파이(Life of Pi)

얀 마텔씨와의 짧은 만남

주말을 틈타 일박 여행을 떠났다. 서울역에서 출발한 기차가 부산역에 도착할 즈음, 파이와 리처드파커를 실은 구명정은  멕시코의 한 해변에 도착했다. 파이가 그토록 원망하는, 리처드 파커가 육지에 닿자 자신을 한 번도 돌아보지 않고 숲 속으로 사라져 버린 그 해변이다. 나는 이렇게 빨리 이야기가 끝나가는 것을 아쉬워하면서도 내가 아주 오랜만에 소설을 읽음에도 여전히 빠른 속도로 책을 읽을 수 있음에 조금은 놀라고 있었다.


해운대의 한 호텔 로비에 앉아 체크인 시간을 기다릴 즈음에는 일본 정부의 운무성에서 파견된 오카모토씨가 그의 부하 치바와 함께 파이를 찾아와 침출호의 침몰 원인을 규명하기 위한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일본계 화물선인 침출호는 파이와 그의 가족, 그의 아버지가 운영하던 동물원의 동물들을 싣고 인고에서 캐나다로 가던 중 침몰했다. 파이라 불린 이 아이, 피신 몰리토 파텔은 침출호의 유일한 생존자이다. 체크인하시겠습니까? 호텔 직원이 내게 다가와 물었다. 오카모토 씨도 피신 몰리토 파텔과 인터뷰를 마치고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가다가 드실 과자를 좀 드릴까요? 파이가 오카모토 씨에게 물었다.


파이이야기. 대만 출신인 이안 감독은 이 이야기를 영화화하여 많은 이들에게 인생작을 선물하였다. 나 또한 영화로 이 이야기를 만났다. 내가 그동안 이 책을 읽지 않은 이유를 굳이 말하자면 영화가 지나치게 좋아 책을 읽을 동기를 찾지 못한 것이고, 오랜 시간이 지나 내가 이 책을 읽게 된 이유를 굳이 말하자면 이 책의 저자의 강연을 듣고 그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예정되어 있던 한 시간 반의 강연 시간을 훌쩍 넘어 두 시간이나 흥미로우며 진지한 이야기들을 쏟아내었다. 그가 본 세상을 전하기에는 두 시간이란 시간도 한 없이 부족한 듯했다. 누군가 먼 미래에서 우리를 찾아온다면 그 또한 그가 살던 세계를 그렇게 술술 말할 수 있으리라.


나는 당신의 책을 읽지 않았어요. 오, 그래요? 당신을 참 솔직한 사람이군요. 그는 당황하기보다는 재미있다는 듯 나를 올려보았다. 네, 저도 당신처럼 철학을 전공했지요. 하지만 저는 지금 사업을 하고 있어요. (철학을 전공한 사람들 모두가 작가를 한 번쯤은 꿈꾸었겠지만 모두가 작가로 먹고살 수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작가가 되다니 당신은 참 운이 좋은 사람이네요. 그는 나의 자조적인 말에 무어라 대답을 하는 대신 내가 건넨 그의 책 사이에 꽂힌 포스트잇을 보고 있었다. 이건 후쿠오카에 사는 딸아이에게 줄 책이에요. 수빈이 맞나요? 그는 포스트잇을 보며 재차 물었다. S.u.b.i.n? 네 맞아요 수빈. 그는 파이이야기 한국어판의 첫 페이지에 자기의 사인을 하고 '수빈에게'라고 적었다.


나는 다른 한 권의 책을 내밀었다. 이 책은 파이 이야기를 포함하여 세 개의 장편소설을 묶어 놓은 책으로 이번에 그의 방한을 기념하여 출간되었다. 이 책이 내가 읽을 당신의 첫 번째 책이 되겠네요. 그는 사인을 하느라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나는 그가 낄낄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는 포스트잇에 적힌 대로 존에게 (to John)라고 적었다. 나는 가지고 있던 작은 도록을 그에게 건넸다. 그리고 이건 내 작은 선물이에요. 이건 당신이 그린 그림들인가요? 아니요. 내가 오늘 이 근처 작은 전시회에 들렀지요. 그날 오후 언제나처럼 북촌을 산책하다 우연히 한 한옥에 들렀다. 그곳에는 아마추어 작가들의 작은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는 데 계동과 북촌의 한옥들의 풍경과 사대문의 풍경을 담은 팬화들이었다. 아홉 명의 작가 중 한 두 명을 빼고 는 모두 그림을 그린 지 몇 년 안 된 동호회원들인지라 딱 보아도 그림실력은 별 볼 일 없지만 그림 속의 한옥이 겹겹이 보이는 서울의 풍경은 나 같은 강남 촌놈에게는 여전히 신선한 풍경이다. 외국인 마텔씨에게는 더욱 그러했겠지.


그는 내가 건낸도록을 후루룩 넘겨보았다. 그의 눈에서 호기심의 빛이 번쩍였다. 선수들은 서로의 눈빛을 알아보지. 소설가들은 작은 우연들을 놓치는 법이 없다. 우연히 내 손에 들어와 그에게 건넨 이 어설픈 도록이 어쩌면 그의 다음 소설에 작은 소품으로 등장할 지도, 한국에서 만난 존이라는 자가 꽤나 비중 있는 살인마로 등장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얀, 나랑 사진 한 장 찍을까요? 물론이지요. 그는 벌떡 일어나 내 어깨에 팔을 둘렀다. 그와 사진을 찍기 위해 고개를 돌리자 내 뒤로 백 명은 족히 넘어 보이는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와 얀 마텔은 어깨동무를 하고 사진을 찍었다.


해 정도의 시간적 차이와 태평양이라는 물리적인 거리를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은 모두 철학을 전공했다. 한 사람은 이미 세계적인 대 작가가 되었고 또 한 사람은 이제 막 자기 사업을 시작했다. 사업을 시작한 이가 열두 해가 지나 그처럼 대문호가 되어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다만 그도 철학과를 나왔고 아직도 가끔 글을 쓴다. 


추기: 얀마텔씨가 파이이야기를 출간한 시점은 2001년으로 그의 나이 서른예닐곱 인 때였음은 밝혀둔다. 마흔이 되기 전에 이미 대문호의 칭호를 받게 된 사람의 인생이란 어떤 것일까 하고 궁금하기는 하다.

(2023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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