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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종호 Apr 12. 2023

완도 출장 보고서


용산역을 출발한 고속열차는 2시간 만에 광주송정역에 도착했다. 택시를 타고 약속 장소로 가는 동안 아파트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종합청사 2층에는 세 개의 중소기업 지원 기관이 함께 입주하여 있다. 택시를 타고 지나고 목가적인 풍경과는 달리 청사의 입구에는 첨단의 보안게이트가 설치되어 있고 그 너머 엘리베이터 옆에는 하나의 기관에 대여섯 명 밖에 안 되는 조직도를 사진까지 넣어 큼지막히 걸어놓았다. 한적한 도시, 한가로운 청사에 걸린 선비의 밥상처럼 조촐한 조직도이다. 희종이가 오랜 지인인 백단장에게 전화를 걸어 도착을 알리자 그 조직도의 말단에 걸린 얼굴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 우리를 단장실로 안내했다. 


희종이를 오랜만에 만난 백단장은 몇 마디 인사를 나누고는 먼저 식사를.. 하며 우리를 근처 보쌈집으로 안내했다. 떡국에 굴이 들어간 것을 희종이는 무척 신기해했다. 나는 중학교 때 친구 집에 갔던 날이 떠올랐다. 때마침 식사 시간인지라 친구의 어머니는 우리에게 떡국을 해 주셨는데 그 안에 굴이 잔뜩 들어있었다. 어머니는 전라도 분이셨나 보다. 굴을 먹어 보지도 좋아하지도 않는 나는 차려주신 음식을 남기는 것이 실례라고 생각되어 굴을 하나씩 입에 넣고 씹지도 않고 억지로 삼키고 있었는 데, 그것을 보시던 친구의 어머니는 억지로 먹을 필요 없다며 그릇을 치워가셨다. 아들의 친구에게 대접한다고 비싼 굴을 잔뜩 넣었는 데 이 놈이 맛있게 먹지를 않으니 조금 섭섭하셨을게다.


백단장은 우리를 차에 태우고는 내비게이션에 완도에 있는 한 회사의 주소를 찍었다. 도착 예정 시간을 보니 고속도로를 타고도 두 시간이나 걸리는 곳이었다. 광주와 그 주변에는 수출을 할 만한 제품을 지닌 회사가 이리도 드문가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최근 관심법을 터득한 나는 백단장의 의도를 살짝 엿볼 수 있었다. 해외 지사에서 오래 근무한 사람들은 저마다 사람들을 만나는 자기만의 방법이 있다. 해외에 나와 있다는 이유로 본사에서 온 선배, 후배에 사돈하고 팔촌까지, 온 김에 간 김에 지나가다 혹은 일부러 여기까지 찾아온 사람들을 모두 만나 주다 보면 해외 근무 중 삶의 절반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접대와 피하지 못한 접대로 채워진다. 


상황이 이러하니 지사 근무에는 업무 효율화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효율적으로 사람들을 만나는 스킬이다. 접대의 목적은 그 사람과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성패는 주어진 시간 안에 얼마나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고 이를 통해 친분을 쌓을 수 있는가에 달렸다. 한국의 아저씨들은 흔하게는 골프를 치거나 술을 마시는 방법을 택하지만, 건강을 챙기고 시간을 날리는 골프나 빠르게 친해지며 건강을 날리는 술이란 무수한 만남을 치러 내는 지사 근무 중에는 매일 써먹을 만큼 효율적인 방법이 될 수 없다. 그렇다. 오랜 시간 해외에서 근무하고 돌아온 백단장에게도 그간 닦아 놓은 자기만의 접대 방법이 없을 리 없다. 우리를 타에 태우고 일부러 먼 방문지를 정하여 차로 이동한 것은 아마도 백단장이 이동 시간 중에 오랜만에 만난 희종과 편안하게 이야기를 나누기 위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긴 대화는 지치기 마련이고 짧게 헤어지면 못다 한 말이 남아 아쉽다. 드라이브 중의 대화란 긴 대화 중에 화제가 떨어져 침묵하는 어색한 시간을 창 밖의 경치로 메꾸어 준다. 역시 노련하다. 하지만 선수끼리는 다 보이지. 


창 밖으로 월출산과 그 주변의 험한 산들이 지나갔다. 백단장의 차는 남쪽으로 내리 달려 기어코 바다를 보고서야 멈추었다. 한 여인이 마중을 나와 먼 길 오셨네요라며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나는 지난주 제주 출장을 다녀오며 수출을 하기에는 너무나 작은 규모의 사업장을 이미 충분히 보았기에 플레이트로 지은 두 동의 작은 건물을 보고 아, 하고 작은 한숨이 나왔다. 스스로를 농부라 자칭하는 씩씩한 여사장은 유기농으로 재배한 유자를 열처리하지 않고 수작업으로 병에 담은 유자청을 내어 놓았다. 역시 제대로 만든 유자청은 맛과 향이 다르다. 구하기 힘든 상품이다. 그런데 지난주 제주에서 내내 내내 마주했던 문제를 다시 마주했다. 한 해 동안이 집에서 생산하는 유자청을 모두 모아도 겨우 한 컨테이너의 양 밖에 되지 않으니 수출은 고사하고 내수도 벅차다. 나는 샘플이라 받아오는 것도 미안하여 극구 사양하였지만 인상 좋은 여사장은 이것저것 맛보라며 희종이와 내 두 손에 가득 물건을 들려주었다. 사실 이런 上品은 어디서 구하지도 못하지.  


두 번째 도착한 곳은 완도의 더 깊숙한 곳에 자리한 공장이었다. 원래는 계획에 없었던 곳이지만 백단장은 유기농 농가가 수출이 불가하다는 사실에 내심 미안하였는지 차 안에서 생각이 났다며 급하게 미팅을 주선하였다. 다시마와 미역으로 면을 만드는 회사이다. 이 회사의 사장도 여자이다. 여사장, 여교수, 여기자... 등등 '여'자를 붙이는 것이 차별적으로 들릴 수도 있지만 나의 세대에는 그것이 자연스러울 만큼 여성의 전문 인력이 드물었고 지금도 사업을 하는 중소기업 대표 중에는 남사장이 대부분이다,라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그것도 나의 편견이었을지 모르겠다. 남도에는 여사장이 대부분이네. 짧은 경험이 편견을 만든다. 


사장이 다음 날 서울에서 있을 홈쇼핑 촬영 준비로 급한 일을 처리한다고 우리를 못 만나고 있는 동안 6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남성이 회의실로 들어왔다. 명함에는 기술 이사라는 직함이 적혀있었다. 나는 다시마와 미역 만으로 면이 만들어지는 것이 너무 신기하여 이것저것 물어보았는 데 이사는 역시 기술자답게 이런저런 것들을 술술 설명해 주었다. 알고 보면 아주 간단한 거지요. 그의 말이 맞다. 하지만 그 간단한 것을 몇몇만 알고 대다수는 모르니까 장사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간단한 것이 포인트가 아니고 아는가 모르는가가 승패를 가른다. 잠시 후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합니다 하며 여사장이 들어오자 이사는 자 나는 이만, 역할 체인지! 하며 인사를 하고 나갔다. 처음 만나도 자리를 편하게 만들어 주는 사람들이 있다. 


중년의 여사장은 원래 이 회사의 서울 본사에서 일을 하던 직원이었다고 한다. 본사와 공장을 관리하다 회사를 인수하였다는 독특한 경력이다. 사장은 직접 제품을 시연하였다. 채반에 국수를 거르고 살짝 물로 헹군다. 끓이거나 물을 넣지 않고 소스를 뿌려 직접 먹을 수 있는 제품이다. 사장의 노련한 손놀림에 아, 홈쇼핑에서 사장님이 직접 나와 시연하시겠죠? 하자 사장은 설마요, 하고 웃었다. 건강한 재료에 편하게 먹을 수 있는 제품이라 크게 확장성이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는데 역시 미국과 중국을 포함하여 최근 해외에서도 여럿이 찾아왔다고 한다. 우리는 중국에 소개를 해보렵니다, 하자 사장은 유통을 확장하는 데 있어 바닥부터 차근차근을 강조했다. 자신의 전략이었다고 한다. 옳은 말이다. 그 간단한 것을 아는 것이 관건이다. 멋지게 말하자면 삶도 그렇고 사업도 그러하다.


광주까지 올라오는 길에는 비가 내렸다. 운전석과 조수석에 앉은 백단장과 희종이는 오랜만에 만나 이야기하며 주변의 사람들과 그간의 일들을 업데이트하였다. 뒷자리에 앉은 나는 둘 사이에 오가는 잘 모르는 이야기에 몇 번 추임새를 넣었다가 차 소리에 잘 들리지도 않고 끼어들 틈도 없다 싶어 그냥 푹 자버렸다. 송정역 앞에 내리니 트렁크 안에 들고 갈 샘플이 가득이다. 가방에 넣을 수 있는 만큼 끼어넣고 그래도 두 손이 무겁다. 그래도 먹는 것에 진심인 우리는 희종의 지인이 추천한 떡갈비를 먹으러 무거운 샘플들을 들고 한 참을 걸었다. 송정원조떡갈비. 떡갈비도 맛있지만 서비스로 나오는 푸짐한 사골국이 일품이다. 가게를 나설 때 샘플박스에 손잡이를 만들려 테이프 박스가 있는지 물으니 직원이지 사장인지 모를 한 아저씨가 직접 테이프로 박스를 감아 특특한 손잡이를 만들어 주었다. 희종이와 함께 전라도의 맛과 인심을 느끼며, 연신 어쨌든 잘 왔다 재미있다 맛있네 하며 만족해했다.


용산역에 도착했다. 아침에 출발하여 반나절 만에 남쪽 땅 끝을 찍고 돌아온 셈이다. 길을 떠나면 출발할 때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은 보고 만나고 얻게 된다. 다시 한번 멋지게 말하자면 삶도 그렇고 사업도 그러하다. 광주, 완도에 출장을 다녀오며 우리는 출발할 때 기대하지 못했던 추억들을 두 손 가득 들고 돌아왔다. 


기차에 내리니 서울의 밤공기가 시원하다. 누구나 고향이 제일 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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