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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종호 Oct 22. 2023

연애사요약(戀愛史要約)

그날 그들의 이야기

오랜만에 넷이 모두 모였다. 우리 넷은 고등학교 친구다. 나는 졸업하고 바로 대학에 들어갔지만 셋은 같은 학원에서 재수를 했다. 그중 한 놈은 재수를 하여 대학에 가고 한 놈은 삼수를, 나머지 한 놈은 사수를 하여 대학에 갔다.


재수를 한 A는 내가 입학한 다음 해 나와 같은 대학의 경영학과로 들어왔다. 우리는 신촌과 강남을 오가며 학창 시절의 거의 모든 시간을 함께 보냈다. 내가 대학 2학년, 그의 대학 1학년이 시작되던 봄, 우리는 첫 여자친구를 만났다. A와 나는 여자친구들과 함께 넷이 자주 만났는데 여자친구들의 이름이 모두 ‘지영’이었기에 가끔 누구를 부르는지 헷갈리기도 했다. 우리는 이 두 ‘지영이’들과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하며 오륙 년을 사귀었지만 결국 우리 둘 모두 ‘지영이’가 아닌 다른 여자와 결혼했다. A는 노래방에 가면 지금도 가끔 김광석의 ‘60대 노부부의 이야기’를 부른다. A가 그의 여자친구에게 자주 불러주던 노래다. 나는 A의 감성을 자극해 볼 생각으로 노래 중간에 ‘지영아’하고 외쳐 보지만 그는 ‘헤헷’하고 헛웃음을 치며 더 열심히 노래만 부른다.


삼수를 한 B는 세 번째의 입시 끝에 누구나 들어도 고개를 끄덕일 만한 대학에 들어갔지만 그의 성에는 안 찼는지 일 년을 다니고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리고 그는 보스턴에서 첫 번째 여자친구를 만났다. 둘은 영화 굿윌헌팅의 배경으로 나왔던 작고 예쁜 학교를 함께 다녔다. 유학생들의 외로움이 쉽게 연애 감정으로 전이되는 일은 흔하디 흔한 일이다. 그들은 뜨거운 연애를 하였지만 몇 개월 후 B는 계획대로 유태인계 명문 대학로 편입을 하였고 그의 여자친구 또한 원래의 계획대로 한국으로 돌아갔다. 한국에 돌아온 그녀는, 이 역시 마치 계획했던 것처럼 그에게 이별을 통보하였는 데, 이 또한 흔하디 흔한 일이나, 이 일이 B에게는 오랫동안 상처로 남았다.  그 후 B의 연애사가 순탄치 못했던 것에 대하여 그의 친구로서 다소 편파적인 해석을 내리자면 당시의 여자친구의 영향이 적지 않다. 어쨌든 시간은 약이 되었고 늦게 결혼한 그는 작년 여름에 이쁜 딸아이를 낳았다.  


사수를 한 C는 재수할 때 만난 동갑내기와 결혼했다. 결혼도 일찍 하여 큰 딸이 벌써 중학교 2학년이다. C가 처음부터 사수까지 하려 했던 것은 아니었다. 재수를 하였지만 목표했던 학교에 또 떨어졌고 결국 그는 성적에 맞추어 모대학에 들어가게 되었다. 고등학교 때 우등생이던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고개를 갸우뚱했을 학교였다. 대학생이 된 그는 고등학교 선배가 원장으로 있는 입시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아르바이트로 시작했지만 입담이 좋은 그의 강의를 들으러 학생들이 몰려들었고 학생들의 요청으로 가르치는 과목을 하나 두 개 늘이다 보니 거의 전 과목을 가르치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강남 학원가의 유명 강사가 될 뻔했던 그는 시험 경향을 알아보겠다고 친 수능에 고득점을 얻었고 그 덕에 B가 잠시 다녔던 그 ‘누가 들어도 고개를 끄덕일 만한’ 학교에 들어갔다. 그가 대학시절, 강남의 한 호프집에서 화장실에 숨어 여자친구를 훔쳐보려던 놈을 추격하여 강남역 앞 길바닥에서 난투 끝에 붙잡은 사건은 지금도 회자된다. 당시 C의 여자친구의 아버지, 지금의 장인어른은 강남구 경찰서의 강력계 반장이시었으니, 범인은 콩밥을 먹기 전에도 모진 고초를 겪었을 것이 눈에 훤하다. 


양꼬치를 먹고 2차로 어디를 갈까 하며 한참을 걷다가 결국 영동시장 끝자락에 있는 이자카야로 들어갔다. 시끌벅적하다. 마늘 닭똥집 구이와 맥주를 주문했다. C는 주위를 휙 둘러보고는 ‘야, 우리가 여기서 최고령인데?’라며 다 아는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는 ‘그러게’하고 맞장구를 쳐주며 우리가 저들의 나이였을 때 다녔던 몇몇 가게의 이름을 끄집어냈다. 20년도 훨씬 전에 자주 갔었던 ‘리틀도쿄’라는 가게 이름이 나오자 B는 ‘거기가 레몬 소주가 맛있었지’ 하며 추임을 넣는다. 옛날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사무라이가 잘 갈아 놓은 칼을 칼집에서 뽑듯이 우리는 각자의 비장의 연애담을 꺼내 놓으려 슬금슬금 손을 허리춤으로 가져간다. 술 마시기 좋은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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