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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 엿듣기 #여인들 #북악산말바위

20240922 북악산 말바위

by 박종호

하릴없는 일요일이다. 동네 뒷산인 북악산 말바위에 올랐다. 추분인 오늘은 하루 중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지는 날이라는 데, 그래서 그런지 어제와는 또 다른 아주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설렁설렁 보도를 따라 산을 오르며 부질없이 지나간 인연들을 떠올렸다. 어떤 추억들은 언제 떠올려도 생생하게 다가온다. 나는 그 추억 속의 등장인물들이 지금 어떻게 바뀌었을까 궁금해졌다. 이렇게 인적 없는 산길에서 마주친다면, 우리가 서로를 알아본다면, 우리는 무슨 말을 건넬까? 재미있지만 부질없는 상상이다. 금아 선생의 <인연>의 마지막 문장이 떠올랐다.


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피천득, <인연> 중에서)


와룡공원에서 성곽을 따 바깥 길을 따라 오르면 성곽 안쪽으로 넘어가도록 세워놓은 계단길이 있는 데 이 계단길 위에 데크에 서면 왼쪽에서 오른쪽 끝까지, 북한산 자락부터 구리시, 잠실 롯데타워 너머 남한산성까지 서울의 동쪽이 한눈에 들어온다. 해는 구름 사이에서 형상을 비추고 바람은 높은 곳부터 시원하게 불어왔다. 새들은 날아올랐다가 바람을 타고 활강을 한다. 롤러코스터를 타는 기분일까.


나무로 만든 데크 길을 따라 내려오면 성곽의 안쪽길로 들어선다. 다시 왼쪽은 도성의 북문인 숙정문을 지나 북악산 정상으로 가는 길이고, 오른쪽으로 잠시 오르면 말바위가 보인다. 백악산(북악산의 옛 이름) 끝자락이라 하여 말바위라 하기도 하고 양반들이 말을 타고 올라와 말바위라 하기도 한단다. 막상 말바위에 올라와 보면 말을 타고 올라와 마시고 노래하며 놀던 자리였겠구나라는 생각이 더 든다. 말바위는 한양을 내려다보며 둘러앉아 놀기 참 좋은 장소이다.


항상 앉는 바위 위에 앉았다. 이 자리에 앉으며 남산 밑 서울 시내와 여의도 63 빌딩 너머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가파른 비탈 위에서 툭 튀어나와 있는 이 자리는 누가 일부러 앉아서 쉬라고 깎아 놓은 듯 평평하다. 널따란 바위의 가운데에는 소나무 한 그루가 솟아 파라솔 마냥 그늘을 만들어 준다. 남산을 바라보며 앉아 조용히 명상을 하려는 데... 내 등 뒤로 네 명의 여인들이 바싹 붙어 앉았다.


언니와 동생으로 이루어진 서른 중반의 여인들은 커피를 내려 마시며 수다로는 가장 맛있는 주제인 험담을 까기 시작했다. 이들보다도 훨씬 언니 뻘되는 한 언니가 A에게 이 여인들의 카톡방에 자기를 초대를 해 달라고 부탁했단다. 커피를 마시던 B는 "나는 싫어"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여인 B는 A에게 왜 자기들 카톡방에 그 언니를 부르는 것이 싫은지, 그녀가 왜 이 그룹에 들어와서는 안 되는지, 구구절절 지난 일을 들어 말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쉴 새 없이 떠드는 동안 나머지 두 여인은 응응하고 맞장구를 쳤고 부탁을 받은 A만 그럼 어떡하니 알겠다고 했는데 어쩌니 하며 난감해하고 있었다.


남산을 향해 앉은 나는 눈을 지그시 감고 명상하는 척하며 여인들의 뒷 이야기를 재미있게 듣고 있었다. 라디오 드라마를 듣고 있는 기분이었다. 등장인물들은 극 중의 성격과 잘 어울리는 목소리를 가졌다. B의 뒷담화와 나머지 여인들의 추임새가 폭풍처럼 지나가고, 잠시의 침묵이 흘렀다. 그녀들의 침묵이 몇 초만 더 길었어도 여인들을 향해 획 돌아서서 그런데 그다음에는 어떻게 되었어요? 하고 물어볼 참이었다. 그런데 다른 톤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기, 포도 좀 드시겠어요?"


헛, 내가 듣고 있는 것을 눈치챈 모양이구나. 졸다가 깬 것처럼 한 번 더 부를 때까지 기다렸다 대답을 했어야 했는데... 나는 바로 돌아보며 큼직한 포도알이 가득 달린 포도송이를 건네는 여인 C를 향해, 아니요 괜찮습니다. 하고는 도청을 들킨 정보원처럼 바로 일어나 자리를 떴다. 뒷담화의 후속 편이 무척 궁금했지만.


말바위에서 내려오는 길에 조금 후회를 했다. 그냥 네 고맙습니다 하고 포도를 한 알 받아먹을 걸, 어디서 오셨냐고 말을 건네고, 북악산 자주 오시는지 물어도 보고. 라디오 드라마 속 등장인물들의 얼굴을 자세히 보아 볼 걸. 혹시 그중에 누군가 오래전에 알던 사람이었을 수도, 같은 시절 같은 학교에 다녔던 사람일 수도 있지 않았을까, 아니면 산을 오를 때 떠올랐던 몇몇의 인물들의 친구나 지인인 일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한국이란 모르는 이를 만나도 이리저리 묻다 보면 닿아지는 좁은 사회이니 넌지시 오래 못 본 사람들의 안부를 들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황당한 상상을 하고, 허무한 상상의 결말에 혼자서 낄낄거리며 산을 내려왔다.


가을이구나. 바람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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