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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종호 Nov 03. 2024

이야기가 있는 밤

벗들과의 수다를 그리며 

나는 수다 떠는 것을 좋아한다. 마음이 맞고 말이 통하는 서너 명의 벗과 함께 맛있는 식사를 나누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삶의 큰 즐거움이다. 그 자리에 맛있는 요리가 있어 시장기를 채우고 좋은 술이 있어 흥을 돋우면 더 좋겠다. 서로의 술잔을 채워주고 술잔을 부딪히며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그리면 왠지 눈 내리는 겨울밤이 떠오른다. 창밖에는 눈이 소복소복 쌓여가고 이야기는 끝이 없다. 쨍하고 잔이 부딪히는 소리는 눈 쌓인 산사에 울리는 풍경소리처럼 즐거운 추임새가 될 것이다. 


우선 좋은 식당을 고르자. 처음부터 각자의 몫으로 나뉘어 나오는 음식보다는 큰 접시나 냄비에 담긴 요리를 벗들에게 덜어 줄 수 있는 음식이면 더 좋겠다. 음식이 맛있어서 우리의 수다가 요리의 칭찬으로 시작되면 좋겠다. 요리가 맛있는 식당을 골랐다는 것은 그날 우리의 이야기 또한 아주 감칠 맛 나리라는 징조이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인간은 누구나 행복해지고 그 음식을 나누며 맛있다는 공감대가 형성된다. 요리는 너무 맵거나 뜨겁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음식이 수다를 떠는 입을 지나치게 자극하여 혀의 기능을 저하시키거나 물을 들이켜느라 수다의 시간을 빼앗겨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수다를 떠는 자리의 음식은 맛있어야 하지만 그렇다고 입구에 줄이 길에 서 있어서 후딱 먹고 자리를 비워주어야 하는 집이면 곤란하다. 주위가 너무 조용하지도 너무 번잡하지도 않았으면 좋겠다. 너무 조용하면 이야기 사이의 정적이 길게 느껴지고 너무 번잡스러우면 말이 자주 끊기고 집중력을 잃는다. 좋은 음악이 흐르면 더욱 좋다. 좋은 음악이란 익숙한 음악이다. 선곡이 좋은 가게에서는 간혹 잠깐! 하고 이야기를 멈추고 잠시 음악에 귀 기울여 듣게 되기도 한다. 


다른 손님들의 테이블 간의 거리는 충분히 여유가 있어 다른 손님들의 말소리가 우리의 대화에 끼어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테이블 사이에 충분한 거리가 있어도 주변에 너무 시끄러운 손님이 있으면 신경 쓰이는 일이다. 물론 우리 테이블이 그런 모습일지도 모르지만... 내로남불이라 하여도 어쩔 수 없다. 


수다를 떠는 자리에는 좋은 술이 있으면 좋겠다. 수다를 떨며 아주 천천히 마시는 술은 취하지 않는다. 혹시 취하여도 매우 기분 좋게 취한다. 자주 술잔을 부딪히는 것은 이야기 중의 추임새이자 완급을 조절하는 장치이다. 숙련된 이야기꾼들은 역시 숙련된 주당들이며 이들은 언제 잔을 들어 건배할지 정확히 알고 있다. 그래서 고수들이 모인 술자리에는 술잔이 부딪히는 소리에 시차가 거의 나지 않는다. 옆 테이블의 잔 부딪히는 소리만 들어도 선수들끼리는 서로의 클래스를 안다. 


훌륭한 목수가 연장을 가리지 않듯, 즐거운 자리는 술을 가리지 않는다. 다만 식사로서의 음식과, 안주로서의 음식에 맞는 페어링은 상당히 중요하다. 음식과 술의 페어링이 잘 맞으면 이야기가 더 부드럽게 이어지고 중간에 잘 끊기지 않는다. 음식과 술처럼 이야기의 흐름도 듣는 이와 말하는 이의 조화, 합이기 때문이다. 음식은 공감의 장을 만들고 술은 그 주고받음을 만든다. 수다도 그러하다. 각자는 서로에게 공감의 기반 위에 말을 건네고 받으며 수다는 점점 더 깊어진다. 


수다는 서로 간의 이해를 넓혀준다. 최근에 느꼈던 것들을 공유하며 벗들은 서로에 대하여 더 많이 알아간다. 함께 지나온 추억을 이야기하며 그 당시의 기억과 느낌을 회상하기도 하고 서로의 부족한 기억들을 모아 디테일을 재현하기도 한다. 공통된 취미가 있어 하나의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좋지만 각자 다른 취미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은 다른 세계를 넘보는 재미가 있다. 최근에 벌어지는 시사의 이야기로 서로의 통찰을 나누는 것은 즐거운 일이지만 정치 이야기가 편을 가르는 이야기로 흐를 것 같으면 그런 주제는 처음부터 피해 가는 것이 상책이다. 


영화나 책, 음악에 관한 이야기는 즐거운 화제이며 날카로운 논쟁으로 이어져도 재미있고 무해하다. 나는 상상의 설정으로 우리를 끌어들이는 영화의 이야기를 좋아한다. 정답이 정해지지 않은 영화의 내용을 주제 삼아 범인이 누구인가를 추리하는 토론은 우리의 단골 안주이기도 하다. 영화 <신세계>에서 골드문 회장 석동철을 죽인 이는 누구인가? 강 과장(최민식)의 주도로 결찰이 죽인 것일까? 정청(황정민)인가? 이자성(이정재)? 아니면 이중구(박성웅)? 


주제가 무엇이든 단단한 인간적인 유대가 있는 벗들과의 수다는 항상 즐겁다. 또한 수다 속에는 항상 자연스럽게 배우고 느끼는 바가 있다. 삼인행 필유아사언 (三人行 必有我師焉)이라 하지 않았던가. 벗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새로운 지식과 통찰을 얻기도 하지만, 그들의 말하는 자세와 말투, 상대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태도 속에서도 많은 것을 깨우친다. 주위에 배울 바가 많은 벗들이 있고 이들과 함께 수다를 떨 수 있다는 것은 정말 즐겁고 감사한 일이다. 


이야기가 있는 밤은 언제나 아름답고, 언제나 그립고, 또 언제나 설렌다. 


우리들 사랑이 담긴 조그만 집에 옹기종기 모여
정다운 이야기 서로의 즐거움 슬픔을 나누던 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즐거운 시절 내 맘속에 추억만 남아
오늘도 눈 오는 밤 그날 생각나네

그 시절의 친구들은 어디에서 무얼 할까 우리들의 얘길 할까
누구를 만나든지 자랑하고 싶은 우리들의 친구 이야기들
세월이 흘러 흘러가서 먼 훗날이라도 그때 그 친구들 다시 만나겠지
 오늘도 눈 오는 밤 그날 생각하네

- 조하문 <눈 오는 밤> 가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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