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지로 시차를 무시하고 한국 시간에 맞추어 일어나려 하니 간밤에 자주 잠에서 깼다. 5시에 맞추어 체육관에 가려던 생각이었는 데 눈을 뜨니 4시 반이다. 어정쩡하게 누워있기가 싫어 일찍이 체육관으로 나왔다. 호텔 3층의 체육관은 24시간 호텔 키 카드로 들어갈 수 있다. 체육관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러닝머신은 뛸까 말까 하는 고민을 일으켰다.
인간은 깨어있는 동안 6000번의 생각을 한다고 한다. 미국 한 대학의 연구 결과이다.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한 책에서 4만 번이라고 쓰기도 하였지만 그 숫자가 어찌 되었든 우리 뇌는 하루 종일 쉬지도 않고 생각을 떠올린다는 뜻이다. 나는 어젯밤 호치민의 한인타운에서 삼겹살과 목살로 포식하였음을 떠올렸고 이어서 '이러다가는 내가 돼지가 되겠는 걸'하는 생각이 툭 뛰어올랐다. 스트레칭을 대충 하고 트레드밀에 올랐다.
정면에 커다란 화면이 달리고 속도와 기울기를 조절할 수 있는 러닝머신(트레드밀)의 시초는 1800년경에는 죄수들의 고문용으로 고안된 기계라고 한다. 요즘 체육관에는 한 사람이 런닝머신을 너무 긴 시간 점유할까 봐 이용 시간을 제한하는 문구를 붙이기도 하는 데, 그 당시에 쓰임에 의한다면 죄수가 고문기계에서 붙어 내려올 생각을 않자 간수들이 고문기구 앞에 "제발 작작 이들 스스로를 못살게 하시오"라고 써 놓은 것과 같다. 나는 스스로를 너무 괴롭히지 않기 위해 아주 잠시만 뛰다가 점잖게 내려왔다. 그래도 땀이 송송 맺힐 정도였으니 운동으로 몸이 좋아졌으리란 기대는 못해도 피부는 좀 좋아지지 않았을까.
아침에는 근처 반미 집을 갔다. 이곳도 맛집이라고 소개받은 곳이다. 호치민의 한 국제 학교 정문 건너에 자리한 이 가게는 일찍부터 교복을 입고 아침을 먹으러 온 중학생들과 아이들을 데려다주러 왔다 만나서 수다를 떨고 있는 한국 아저씨들이 이미 길가 테라스 자리를 잡고 앉아있었다. 1980년부터 이어온 이 가게의 반미에 대한 나의 평가는 75점. 정성적 표현으로는 그냥 그렇다이다.
사실 내가 먹어본 가장 맛있는 반미와 쌀국수는 안국동에 있는 나향이란 베트남 국숫집에서 먹은 쌀국수와 반미이다. 나향의 셰프는 캘리포니아에서 베트남 요리를 배워 왔다고 한다. 우리나라에 널리 알려진 베트남 쌀국수의 맛은 미국식 베트남 쌀 국수 맛이라고 전해지는 데 한국인의 입맛에 최적화되었다는 말은 우리에게 맛있다는 뜻이니, 그 맛을 본 나는 베트남 본토에 와서 촌스럽게 불만만 쏟아낸다. 미국인이 한국에 와서 김치찌개를 먹고 자기 동네의 김치찌개 맛보다 못하다고 평하는 꼴이다.
물론 그가 코리아타운에서 왔다면 그의 말은 일리가 있을 수 있다. 해외에 사는 한국 사람들에게 그리운 고향의 맛이란 그가 고향을 떠나온 시간만큼이나 그의 머릿속에 '정말 맛있는 음식'으로 미화되기 마련이다. 그러니 한인타운에서 가끔 먹는 한국음식이란 웬만큼 맛있지 않고는 그들에게 특별한 감흥을 주지 못한다. 미국의 동부와 서부를 막론하고 코리아타운에서 맛없는 한국 음식점은 없다. 맛이 없는 식당이란 모두 일찍이 문을 닫고 사라졌기 때문이다.
삼일 차 전시다. 오전 중에는 방문객이 적어 매우 한가하다가 점심 넘어서부터는 사람들로 북적이기 시작했다. 아마도 바이어들은 전시장 방문이라는 외근이 있으니 아침 시간을 사무실에서 설렁설렁 때우고 점심깨부터 전시장을 어슬렁거리다 그대로 퇴근하려는 작전인 모양이다. 어딜 가도 직장인들의 심산은 비슷비슷하다. 그렇게 생각하는 내가 문제라고? 그럴지도 모르지만 어쩌겠는가,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
삼일째 전시가 끝났다. 식사를 초대받아 어제 들렀던 한인타운에서 다시 고기를 구웠다.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 데 위장이 먼저 고국에 돌아왔다. 한국에 내어 놓아도 손색이 없는 맛이 아니라 한국에서 먹기 힘든 뛰어난 맛이다. 입이 호강하고 배가 부르니 피로한 몸에 잠이 쏟아진다. 이제 하루 남았다. 오늘도 수고했다. 내일도 힘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