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마지막날, 토요일이다. 한국이 쉬는 날 일을 해야 하는 것에 심술이 나서 한참을 침대 안에서 꼼지락거리다 일어났다. 텔레비전을 틀었다. 텔레비전의 광고를 보고 이 시장에 대하여 조금이나마 힌트를 얻을까 생각해서였는 데 웬일인지 채널을 아무리 돌려도 광고는 보이지 않았다. 넷플릭스와 유튜브와는 달리 실시간으로 방영되는 텔레비전은 정보를 접하는 데 우연이 좌우한다. 내가 프로그램의 방영시간이 맞추어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어야 하는 불친절한 매체이다.
채널을 옮기다 멈춘 NHK 글로벌에는 동경 시부야에 서 있는 강아지 조각의 주인공인 하치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었다. 아키타견 하치는 1923년 태어나 동경대학교 농업공학과 우에노 교수의 집에서 자랐다. 하치는 하루도 빠짐없이 우에노 교수가 퇴근하는 시간에 시부야역으로 나와 교수를 마중하였고 2년 후 교수가 죽은 뒤에는 다른 집으로 입양을 가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에 여러 집을 전전하다 결국 길거리를 떠도는 노견이 되었는 데 그럼에도 매일 저녁이면 시부야역에 나타나 누군가를 기다렸다고 전한다.
시부야에는 충견 하치를 추모하는 동상이 세워져 있다. 일본 사람들이 하치의 사연을 듣고 주인에 대한 충심을 기리고자 동상을 세웠다고 한다. 개에게서도 이런 충심이 있는 데 인간이라면 응당 더 큰 충심을 가져야 하지 않는가란 비유적인 압박이 느껴진다. 나는 이런 아름다운 이야기에 충이라는 단어보다는 그저 사랑과 그리움이란 표현을 쓰고 싶다. 한편으로는 죽은 주인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결국 다른 주인에게 정착하지 못하고 노견으로 생을 마감한 하치가 안타깝기도 하다. 그런데 우에노 교수가 살아있을 때에 하치는 혼자서 시부야역으로 나가 그를 기다렸을까? 매일 하치를 데리고 나와 남편을 혹은 아빠를 기다렸을 그 사람들의 잊혀진 사랑이야기가 더 궁금하다.
하치 이야기가 끝나자 스모 하이라이트가 이어졌다. 후쿠오카시에서 열린 스모대회에서의 경기 영상이다. 나는 스모를 볼 때마다 저게 무엇이 그렇게 재미있어서 사람들이 볼까 하고 생각한다. 물론 스모란 스모만의 긴박감이 있다. 모래판 위의 두 역사가 힘차게 부딪힐 때의 박력과 180kg에 달하는 거구가 훨씬 작은 체구의 역사에게 넘겨져 모래판 아래로 던져지는 반전의 쾌감도 느껴진다. 하지만 우리의 씨름에 비하면 다리를 적극적으로 쓰지 않고 기술이 제한적이다. 몸무게가 나갈수록 유리한 경기를 특성상 역사들은 지나치게 과체중이어서 왠지 멋지다는 느낌이나 민첩함도 느껴지지 않는다. 외국인들이 모르는, 일본인들만이 느끼는 스모의 또 다른 매력이 있을 것이다. 그래도 씨름이 인기가 사라져 버린 것에 비하면 일본은 자신들만의 스포츠를 잘 가꾸어 가고 있다는 생각이다.
전시 마지막날은 언제나 일찍 파장 분위기이다. 비즈니스를 하러 온 사람보다는 공짜로 샘플을 받거나 싸게 물건을 사려는 사람들이 더 많다. 나도 일찌감치 부스를 정리했다. 낚싯대를 접을 때는 미련을 두어서는 안 되는 법이다. 토요일 오후이지만 사무실에서 미팅을 하자는 바이어가 있어 2군 지역으로 향했다. 호치민은 지역마다 번호를 붙여 구분하는 데 원래의 도심인 구도심은 1군, 전시장이 있는 지역은 7 군이다. 알찬 미팅을 마쳤다. 큰 바이어 앞에서 내가 너무 후카시(허세)를 넣었나 하고 생각했지만 사업은 기세 싸움이고 밀리면 지는 것이다. 일주일 후에 서로의 패를 까보기로 하고 웃으며 헤어졌다.
공식적인 출장 일정을 모두 마쳤다. 우리는 구시가지인 1군으로 향했다. 이곳에는 프랑스식 건축 양식의 건물들과 현대식 건물들이 뒤섞여 있다. 작은 카페와 가게들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오토바이와 사람들이 뒤섞이는 정말 생동감 넘치는 지역이다. 프랑스식으로 지어진 호치민 시청 앞에는 호치민의 동상이 서 있다. 호치민을 비롯하여 모택동, 스탈린, 레닌 등 공산당 지도자들의 동상들은 하나같이 한 팔을 위로 올리고 서 있는 모습이다. 함께 가자 일까, 나를 따르라 일까. 그러나 인민들은 그런 한가한 소리에 아랑곳하지 않고 즐거운 토요일 저녁을 보내느라 바쁘다. 지도자 동무, 힘드실 텐데 올린 손을 잠시 내려놓으시거나 손을 슬쩍 바꾸어 드셔도 좋습니다.
호치민의 마지막 밤이 지나간다. 내일이면 더운 베트남을 떠나 겨울에 들어선 고국으로 돌아간다. 서울 기온이 영하로 떨어졌다고 한다. 공항서 내리면 무척 춥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