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색-하다 窘塞하다 /
필요한 것이 없거나 모자라서 딱하고 옹색하다.
자연스럽거나 떳떳하지 못하고 거북하다.
나이가 오십에 가까워지면서 어느 자리에 가도 자꾸 주변을 두리번거리게 된다.
지금 내가 어울리는 자리에 와 있는지, 나의 행색이 그 자리에 어울리는 지도 신경 쓰인다. 남은 나를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데 나만 괜한 걱정을 한다. 내가 스스로를 신경 쓰는 만큼 괜히 비교당하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그동안 아무렇지도 않던 것들이 군색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나의 행색이 다른 사람에게 군색해 보일까 걱정이 되기도 한다.
돼지의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더니.
다른 사람들을 보며 나의 처지를 가늠하고 어찌 보일까 걱정하는 것은 스스로가 그러한 기준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있다는 반증이 아닐까.
마음에 꺼림이 없는 사람은 어느 자리에 나서도 꿀릴 것이 없다. 어릴 적을 생각해 보자. 천진한 아이들은 주변에 누가 있어서 움츠려들 거나 옷을 좀 후지게 입었다고 창피해하지 않는다. 우리가 아이처럼 천진하게만 살아갈 수는 없지만 스스로에 기준이 명확하고 자신이 세운 기준에 맞추어 살아가는 사람은 어느 자리에서도 당당할 수 있을 것이다.
살아가며 자기의 원칙과 기준을 정하는 일만큼이나 그 기준에 따라 사는 일은 훨씬 더 어렵다. 현실 속의 우리는 호구지책을 내세워 세상의 꼼수(잔기술)를 몸에 익히고, 상황에 따라 빵빵하던 양심을 조금씩 팔며 살아간다. 조금 치사해도 당장 등 따습고 배부른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살게 된다.
옳은 쪽보다는 편한 쪽으로, 공평하기보다는 나에게 득이 되는 쪽으로 일이 풀려가기를 기도하며 사는 것이 세상이고 인지상정이라지만, 왠지 씁쓸하다. 어찌어찌하다 보니 언제부터인가 옳고 그름의 기준이란 것이 아주 애매해져 버렸다. 한마디로 말하면 양심이 불량해진 것이 아닌가 싶다.
나이가 들며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더 많이 신경 쓰게 되는 이유가 혹시 우리가 잃어버린 내면의 당당함을 외부의 다른 기준으로 보상받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양심의 허기를 비교의 우월로 메울 수 없듯이, 허기를 더 큰 허기로 덮을 수는 없다.
노래 <나는 반딧불>에는 반딧불의 이야기가 나온다. 우리가 내면의 당당함을 회복할 수 있다면, 반딧불처럼 마음속에 밝은 빛을 품고 살 수 있다면, 우리는 노래에 나오는 반딧불처럼 누군가에게 눈부신 별이 아니어도 스스로 빛이 나고 두리번거리지 않으며 스스로 만족하며 살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내가 빛나는 별인 줄 알았어요
한 번도 의심한 적 없었죠
몰랐어요 난 내가 벌레라는 것을
그래도 괜찮아 난 눈부시니까
- 노래 <나는 반딧불> 정중식 작사, 작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