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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현실의 삶

by 박종호

'인간은 살아오면 겪은 모든 일들을 기억한다. 다만 떠올리지 못할 뿐이다'라는 말은 '우주 어딘가에는 우주인이 존재한다. 다만 우리 앞에 나타나지 않았을 뿐이다'라는 말과 같다. 어떤 기억이 떠오르기 전까지 우리에게 기억의 존재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하지만 기억하지 못한다고 하여 그 기억이 사라졌다거나, 기억 속의 사건과 경험이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우주인이 아직 우리 눈앞에 나타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 부재를 증명하지 못하는 것처럼.


기억나지 않는 존재는 우리에게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 어떤 연유로, 누군가의 말 한마디로, 혹은 지나가는 어떤 얼굴로 우리의 시냅시스를 타고 기억이 소환되는 순간, 기억 저 편에 숨어있던 디테일들, 사람, 사건, 빛, 색, 냄새, 소리 그리고 그들과 연관된 얽히고설킨 서사가 우리 앞에 와르르 쏟아진다.


장자는 꿈을 꾸었다. 그는 나비가 되어 꽃과 꽃 사이를 훨훨 날아다녔다. 다행히 그는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나비의 자유로움만을 누리고 새에게 잡혀 부리로 살점이 뜯기는 끔찍한 경험을 하지 않고 꿈에서 깨었다. 장자는 생각한다. 내가 나비의 꿈을 꾼 것일까, 나비가 나의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장자가 던진 질문의 답은 인간 장자가 나비의 꿈을 꾼 것이다. 그가 꿈 속 나비였을 때 그는 인간 장자의 기억을 모두 잊고 나비로서 살았지만 그 감정과 욕망은 인간 장자로서 가지고 있던 지극히 인간적인 경향성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유명한 이야기(호접몽)는 우리에게 큰 시사점을 남긴다.


우리는 매번 꿈을 꿀 때마다 랜덤으로 자아와 상황이 설정된다. 꿈의 세상으로 던져져 직업이 바뀌기도 하고 시대가 바뀌기도 한다. 어떤 배경 속에 어떤 역할이 주어지던 우리의 영석한 뇌는 모든 것들을 재빠르게 파악하고 그것을 현실로 믿도록 합리화한다. 꿈을 꿀 때 자아의 영속성을 담보하던 기억은 사라지고 자아가 가지던 사고의 경향성만 남는다. 장자가 나비가 될 수 있었던 이유이고, 나비이지만 여전히 장자인 이유이다.


우리가 2300년 전 장자가 던진 존재론적 질문을 선택적 질문으로 만들 수 있다면 어떨까? '인간 장자로 살 것인가, 나비 장자로 살 것인가?' 영화 <매트리스>에서 모피어스는 네오에게 두 개의 알약을 내민다. 파란색 알약은 지금까지 살던 가상의 현실에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계속 살아가는 약이다. 대신 빨간 약은 지금의 현실이 가상의 현실이란 것을 깨닫게 되고 가상의 현실로 보내지기 전인 진짜 현실로 들어가는 약이다.


진짜 현실과 가짜 현실을 구분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 현실에 대한 기억이다. 기억이 없다면 우리는 꿈과 현실을 진짜 현실과 가상의 현실을 구분할 수 없다. 꿈에서 깨어도 여전히 우리가 잠들기 전의 우리인 이유는 기억이 과거 나와 지금의 나를 동일한 자아로 엮어주기 때문이다.


나비꿈을 꾼 장자가 나비가 아닌 인간 장자로 돌아온 것도 그에게 남아있던 기억이다. 모피어스가 제안한 선택지는 가상의 현실로 들어가기 전을 기억 하겠는가 아니면 잊고 살겠는가이다.


당신이 모피어스에게 선택을 제안받고 두 개의 세계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어떤 색의 알약을 택하겠는가? 지금의 현실이 최악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더 쉽게 파란 알약을 택하겠지만 대부분은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진짜 현실'이 지금보다 더 나으리라고는 확신할 수 없어 빨간 알약을 택할 것이다. 더군다나 현실에 대단히 만족하고 있는 사람은 괜한 욕심을 내어 엉뚱한 상황에 빠지는 것을 피할 것이다.


문제는 현실에 대한 만족도를 떠나 이 현실이 거짓이라는 생각을 견디지 못하여 파란색 알약을 택하는 이들이다. 이 부분에서 우리의 고민이 시작된다. 우리에게 현실은 반드시 진짜 현실이어야 할까. 눈 앞에 현실이, 아무리 의심하여도 거짓임이 드러나지 않는 현실이 반드시 진짜이어야 할까. 진짜 가짜가 행복과 불행보다 더 중요할까.


인공 다이아몬드(lab-grown diamond)는 지구의 지층에서 만들어진 다이아몬드와 동일한 물리구조를 가졌다. 오히려 자연산 다이아몬드보다 월등히 결점이 적고 형태적으로 더 완벽하다. 명백히 실험실에서 만들어졌지만 훨씬 더 저렴하고 품질이 뛰어나다. 우리가 굳이 비싸고 결점이 많은 진짜 다이아몬드를, 진짜 현실을 택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현대 과학은 상상을 넘어서는 속도로 우리의 인식 세계를 파헤치고 있다. 그 응용도 광범위하다. 첨단의 연구 끝에 우리는 이 세상이 누가 만들어 놓았는 지도, 그 출구도 알 수 없는 가상의 현실이라는 결론에 다달을 지도 모른다. 또 어쩌면 우리가 가상 현실을 만들어, 누구나 자신이 선택한 가상현실을 속에서 되고 싶은 인물로 살 수 있는 때가 올지도 모른다.


과학의 발달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윤리적인 질문들을 던진다. 만약에 이 세상이 누군가 만들어낸 가짜 현실이어도 우리는 지금처럼 열심히 살아갈 것인가. 우리가 선택한 가상의 현실로 살 수 있다는 선택지가 주어진다면 우리는 그 속의 펼쳐지는 완벽한 각본의 삶을 선택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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