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 신고를 취소합니다.(길고양이)

by 박종호

"아저씨, 아저씨, 여기 좀 와봐요." 조계사 뒷길 인도 옆 바위에 걸터 앉은 한 아주머니가 나를 불러 세웠다. 네. 그녀와 멀리 떨어지지 않은 길 가운데에 삐쩍 마른 검은 고양이가 한마리 앉있다. 얼마전 장인집에서 기르기 시작한 고양이와 비슷하게 생긴, 발목이 하얀 양말 고양이이다.


"저 고양이가 다리가 아파요. 조계사 종무소에 이야기 좀 해줘요." 네? 종무소에 뭐라고 말을.. "후문에 고양이가 아프다고 하면 동물병원에 연락해서 바로 데리고 가게 할 거예요." 네. 나는 뒷문을 통해 조계사에 들어가 종무원을 찾았다. "저기, 후문에 고양이가..." 종무원 직원은 당황한 모습이 역력했다.


종로에는 수 많은 길고양이들이 산다. 사람들이 이사를 가면 고양이는 동네에 남는다. 기르는 주인보다는 사는 터에 붙어 사는 습성 탓이다. 길고양이가 된 고양이들에게 영역을 지키는 일은 목숨을 건 전쟁이다. 고양이들 간의 영역싸움에 꼬리가 잘리기도 하고 애꾸가 되기도 하고 절룩거리게 되기도 한다.


아침 산책에 산책을 나서면 각 구역마다 항상 같은 길고양이들을 보게 된다. 간혹 새끼 고양이들이 출현하는 데, 죽은 고양이는 보이지는 않는다. 고양이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숨어서 죽는다고 한다. 아프리카에 늙은 코끼리들이 와서 죽는 코끼리 무덤이 있다고 하는 것처럼 동네마다 고양이들의 비밀 무덤이 있을 지도 모른다.


아주머니가 종무원에 부탁하라고 한 고양이는 양 뒷발을 절룩거렸다. 교통사고일까. "아니 저 얘가 나를 자꾸 처다보는거야, 법상치 않은 고양이구나, 구해줘야겠다 생각이 들었어요." 전생과 현생을 아우르는 인연을 중시하는 불교 신자는 고양이의 시선에서 자신과의 인연을 느꼈고 마침 내가 그 앞을 지나고 있었다.


아주머니의 말과는 달리 조계사 종무소는 동물 구조를 하지 않는다. 우연한 타이밍으로 고양이과 아주머니의 인연 사이에 우연히 끼인 나는 이제 가던 길을 멈추고 이 고양이를 위해 무엇이라도 방법을 찾아야하는 상황이 되었다. 119에 전화했다. 안내에 따라 120 종합 민원센터를 통해 구청에 민원을 넣었다.


오늘은 구청이 쉬는 일요일이니 내일이 되어야 구조가 가능하리라 생각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가 왔다. 아마도 구청에서 운영하는 동물구조협회인 모양이다. 구조대는 고양이의 상태와 위치를 확인했다. 저녁이 되어야 구조를 올 수 있다고 했다. 그럼 구조된 고양이는 어떻게 치료를 받나요?


네, 저희는 기본적으로는 보호 시설이고요, 저희가 구조를 하여도 아주 간단한 치료만 하게 됩니다. 상처에 빨간약을 바르는 정도라 보시면 됩니다. 그 다음은요? 네, 일정 기간 동안 저희가 시설에서 보호를 하면서 입양 가구를 찾습니다. 만약에 입양 되지 않으면요? 저희가 계속 보호를 할 수 없으니 살처분을 하게 됩니다.


네? 고양이가 아파서 구해달랐더니 적당히 치료가고 입양이 안되면 죽인다고요? 다시 살던 곳으로 돌려 보내주실 수는 없으신가요? 네, 그렇게는 안됩니다. 어떻게 하시겠어요? 보호 시설에서 성묘가 입양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나는 길에서 마주친 아주머니의 부름 때문에 한 고양이의 생사 결정을 해야하는 입장에 놓였다.


몇 년전 코로나 탓에 한국에 못오고 가족들이 있는 후쿠오카에서 2년을 지냈다. 우리 집 앞은 '모모치하마'라 불리는 바닷가이다. 특별히 할 일이 없던 나는 매일 아침 길게 뻣은 백사장을 걸으며 일출을 보았다. 그날 아침도 백사장을 따라 걸었다. 그때 검은 가마우지 한 마리가 뭍에 올라와 기지게를 켜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국민체조를 하는 것 처럼 날개를 펼치며 퍼더덕 거리는 모습이 신기하여 조금 더 가까이 갔다. 아주 가까이 갔지만 새는 도망가지 않았다. 가만히 보니 가마우지의 양 날개에는 낚시 줄이 엉키어 있었고, 새의 국민 체조는 그 나이롱 줄에서 벗어나려는 필사의 노력이었다. 그날도 오늘처럼 일본의 119에 전화를 했다.


경차로 만든 귀여운 경찰차를 타고 동네 경찰이 왔다. 모모치하마 해변공원을 관리하는 관리소에서도 커다란 뜰 채를 들고 왔다. 이들은 외국인이 새를 구하려 자기들을 불러낸 것에 좀 의아스러운 듯했다. 안타깝게도 사람들이 모이자 가마우지는 날개짓을 멈추고 바다로 들어갔다. 잠시 둥둥 떠다니는 듯 싶더니 물고기를 잡을 때처럼 물 속을 퐁하고 들어갔다. 그 후에 새는 아무리 기다려도 물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때도 오늘처럼 우연히 다친 동물과 마주쳤고 우연히 이들의 구조를 요청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두 번 모두 크게 동정심이나 책임감을 느끼지 못했다. 마주치지 않았으면 했고 귀찮기도 했다. 마주한 이상 이 상황이 마치 나의 인간됨을 시험하는 것처럼 느껴져 쉽게 포기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래서인지 두 번 모두 결국 구조에 성공하지 못했다.


더 뜨거운 마음으로 더 열심히 구해내지 못한 그들에게 미안한 마음이다. 마주하는 사건들은 스스로의 한계를 마주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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