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로 다른 사람의 신발을 신어보다('putting yourself in someone elses' shoes')는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어본다는 말이다. 그림형제의 <신데렐라>에는 남의 입장이 되어 보는 것, 남의 구두를 신어 보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나와있다. 두 의붓 언니는 유리 구두를 신기 위해 발가락과 뒤꿈치를 칼로 자른다.
'남의 신발을 신어보다'라는 말에서도 나타나 듯, 우리는 언제나 내 발에 남의 신발을 신어보고, 나의 입장에서 남을 해석한다. 나로 시작하는 이해는 인간이 가진 근원적인 한계이다. 내 식대로 생각하고 '나는 너를 이해한다'라는 전재하는 데서 오해가 생겨난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건너지 못하는 오해가 생겨나는 이유이다.
진정한 공감은 열린 마음이 전재되어야 한다. 우리는 끊임없이 상대의 입장이 되어 보려 노력해야 하지만 여전히 나의 이해가 옳았는지 상대와 부단히 소통해야 한다. 누군가를 잘 알고 그의 생각을 모두 이해한다고 생각한다면 그 생각이 근원적으로 오해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해 보아야 한다.
동대문 DDP에서 열린 디오르(Dior) 전을 다녀왔다. 1915년 태어난 디자이너 Dior가 시작하여 지금까지 이어지는 명품 브랜드의 Dior의 작품들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전시였다. 무엇보다 공간과 빛을 잘 활용한 전체적인 전시 디자인이 작품의 배치와 색과 어우러져 관객들을 압도하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전시였다.
전시를 보고 나와 이런 의문이 들었다. '남자 디오르가 어떻게 여자의 옷을 저렇게 잘 만들 수 있을까?' 남자 디오르는 어떻게 자신이 입어보지 못하는 여자의 옷으로 전 세계 여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을까. 개개인의 미적인 선호도가 다르고 남녀의 미적 취향이 다른 데 말이다.
Dior는 어떻게 여자옷을 만들 수 있었을까? 어떻게 세기와 국경을 넘어 여성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었을까? 그가 위대한 디자이너로 칭송받기 전까지 그 또한 부단한 소통의 노력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어느 날, 그에게 그가 누군가의 신을 신기보다는 자기의 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신기는 날이 왔을 것이다.
타인과 공감하려면, 감동을 주려면 부단히 듣고 물어야 한다. Dior 씨 맞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