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이들과 아내가 사는 집을 떠나 한국에서 일을 한다. 물론 자주 오간다. 주말을 끼고 잠깐잠깐 집에 들르는 장기 출장을 지속하는 셈이다. 해외에 있는 우리 집에는 차가 있다. 차는 네 식구가 움직이는 데 편리한 물건이다. 내가 주로 시간을 보내는 출장지 한국에는 차가 없다. 사무실 지척에 혼자 사는 집이 있고 건물 지하에 지하철이 연결되어 있다. 멀리 돌아다닐 일도 없으니 그동안 차 없이도 불편할 일이 없이 지냈다.
해외에서 살던 가족들이 들어온다. 딱 10년 만이다. 아이들과 아내가 한국으로 들어오니 이제 출장지는 집이 된다. 네 식구가 살 집을 구했다. 네 식구가 움직이려니 차도 하나 사야겠다. 출장지에서 웬만한 거리는 걸어 다니고 먼 거리는 전철을 타는 것에 익숙해진 나는 차를 몰고 다니면 어딜 가도 주차장 걱정을 해야 할 것이라는 생각에 귀찮은 마음이 앞선다. 그나마 예전처럼 자주 술을 마시지는 않으니 대리비는 좀 아끼겠다.
차를 사자고 마음을 먹었다. 어떤 차를 살까 생각하니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네 식구가 편하게 탈 수 있는 안전한 차면 그만이다 생각했지만, 일본에서 장인, 장모가 오시면 모시고 여행이라도 가야지 생각하니 역시 좌석이 3열로 된 큰 차가 필요하겠다. 회사일로 짐을 나를 때도 유용할 것이다. 그런데 이전부터 아내는 너무 큰 차는 운전하기 조심스러워 싫다고 했다. 넉넉한 공간이 있지만 그다지 크지 않은 차라는 것이 존재하는가.
아내에게 어떤 차를 살까 물어보았다. 아내가 아침에 딸들을 학교에 태워주면 나는 그 핑계로 차를 몰지 않고 전철로 출근할 것이다. 사무실 바로 맞은편이어서 걸어 다니던 집은 이제 전철로 두 정거장이나 떨어지게 되었다. 아내는 내가 불러주는 두어 개의 자동차 이름을 듣더니 자기는 잘 모르겠으니 나에게 알아서 하라며 선택의 고민에서 쏙 빠져버렸다. 너무 크지 않은 차라...
나는 중고차 사이트를 열어 차들을 뒤졌다. 자동차를 고를 때에는 브랜드와 크기, 모양, 옵션까지 너무 많은 선택지를 고민해야 한다. 어떤 사람은 어떤 차를 타야 한다는 규칙이 있으면 좋겠다. 그렇다면 누구도 분에 맞지 않는 차를 타는 일은 없을 것이고 누가 어떤 차를 탄다고 주제넘다는 말도 들을 일이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어떤 차를 타야 할지 하는 생산적이지 못한 고민은 사라질 것이다.
쓰임만을 생각하면 차의 사양이란 그다지 차이가 나지 않는다. 가격이 경차의 수백 배가 넘는 슈퍼카는 정지된 상태에서 100km의 속도에 이르는 이른바 '제로백'이 단 3초이고 최고 속도가 시속 300km를 넘어서지만 그건 수심 100미터에서 방수가 되는 롤렉스를 일상적으로 차고 다니는 것과 같이 일상적으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일이다. 기능적인 사양이 명확하다면 차를 고를 때 정말 고민하게 되는 것은 무엇인가?
고리타분한 이야기이지만, 나이가 들며 차는 마치 옷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릴 적에는 무엇을 입어도 편하면 그만이었다. 좀 허름하고 허름하게 입는 것이 멋인 시절도 있었다. 다 같이 내세울 것이 없는 젊은이들은 서로 고만고만하니 행색이 어쨌든 서로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 나이가 들수록 옷차림은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옷을 후줄근하게 입고 다니는 사람을 보면 단박에 초라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어른들은 보이는 것만 믿는다. 어린 왕자처럼 상자 그림 속의 양들을 보지 못하고 주머니 안에 든 코끼리도 알아맞추지 못한다. 그러니 하는 수 없이 어른들에게는 이것저것 설명해 주어야 한다. 차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을 타는 사람이고 옷차림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을 입고 있는 사람이라고. 이런 것들을 알아들을 수 있게 차근차근 설명을 해 주어야 한다.
문제는 어른들이란 언제나 바빠서 누군가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을 시간이 없고 게다가 남의 이야기라면 더욱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니 그들과 친해지는 방법은 화려해 보이고 옷을 입고 비싸 보이는 차를 타는 수밖에 없다. 어른들이 보고 싶은 것을 보여주는 것이 그들과 가장 쉽게 친해지는 방법이다. 이 원리는 사기꾼들에게도 쓰임이 있어 이는 다른 사람을 가장 쉽게 믿게 만드는 방법이고 가장 싸게 속이는 방법이다.
차를 고르며 나또한 눈에 보이는 것만 믿는 어른이라는 것을 새삼 느낀다. 특히 대한민국의 어른들은 이것저것 신경 쓸 것들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