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더워져 여름이 오는가 싶더니 어제 그제 비가 내리고 쌀쌀한 날씨가 이어졌다. 그래서인지 주변에 기침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나도 요 며칠을 조금 춥게 지냈더니 기침이 나온다. 켁켁. 주변 사람들이 잠시 나를 쳐다보았다가 다시 원래 하던 일로 돌아간다. 기침은 참기 어렵다. 가끔 비행기에서 앉아서 졸다가 사래가 들어 연달아 기침을 하기도 한다. 나이가 들어서라고 하는 데 주변 사람들에게 여간 미안한 것이 아니다.
기침은 방귀나 트림처럼 어쩔 수 없는 생리현상이다. 어쩔 수 없다지만 우리는 남들의 사정에 그리 관대하지 못하다. 조절이 안 되는 생리현상에도 사회는 TPO (time, place, occasion)을 요구한다. 기침도 예외가 아니다. 우리의 기침에 대한 민감도는 코로나를 거치며 더욱 높아졌다. 동남아 어느 나라에서는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가 유행을 하고 치사율도 높다고 하는 데... 이런 뉴스와 오버랩되며 내가 겪었던 팬데믹의 공포가 떠오른다.
내가 어렸을 때도 세계적인 독감이 여러 번 유행하였지만 내가 기억하는 첫 번째 팬데믹은 중국에서 건너온 사스였다. 나는 그 당시 상해에서 살고 있었다. 학교는 수업을 멈추었고 마스크의 착용이 강제되었다. 북경과 광주가 봉쇄되고 상해만 자유로이 오갈 수 있었는 데, 상해가 다른 도시보다 안전하였다기보다는 중국 정부가 행정마비를 우려하여 발병을 묵인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밤마다 요란하게 울리는 앰플런스 소리에 잠을 설치다 결국 나도 서울로 돌아왔다.
그다음 떠오르는 기침의 공포는 메르스이다. 얼마 전 넷플릭스에서 본 드라마 <낭만닥터 김사부>에서 응급실로 들어온 가족이 메르스로 의심되자 응급 병동 전체를 봉쇄하는 장면이 나온다. 메르스의 높은 치사율은 사회를 순식간에 공포로 밀어 넣었다. 메르스를 겪으면서 모든 사람들이 음압실이란 단어를 알게 되었다. 아름다운 눈을 지닌 낙타가 숙주라는 것이 알려지며 사람들은 낙타가 성질이 매우 더럽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코로나는 사스와 메르스에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치사율도 높았고 기간도 오래 지속되었다. 전 세계가 한 번에 이렇게 치명적인 팬데믹을 겪는 것은 빌게이츠 같은 천재 몇 명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호흡기, 특히 호흡기로 전염될 수 있는 병원균의 확산을 막기 위하여 모두는 오랫동안 격리된 삶을 살았다. 우리에게 온라인이 없었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외로움으로 죽었을 것이다.
사스, 메르스, 코로나. 이 세 팬데믹의 시기에 사람들이 두려워했던 것은 전염이었고 전염을 일으키는 대표적인 매체가 기침이었다. 전철 안에서 기침을 하면 단박에 주변의 사람들이 멀찌감치 떨어지거나 혹은 옆 칸으로 사라지고는 했다. 그때와 비교하면 지금 사람들의 기침에 대한 반응은 양반이다. 기침을 하는 사람도 지나치게 미안해하지 않는다. 팬데믹 때를 생각하면 우리가 타인을 잠재적인 숙주로 보고 전염의 공포를 느끼지 않고 살아가는 것 자체가 다행이다.
그래도 오뉴월 감기는 개도 안 걸린다고 하니 모두 감기 조심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