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 신문을 읽습니다.

나의 신문 읽기

by 박종호

i.


나는 신문을 좋아한다. 습관적으로 헨드폰의 앱을 열어 포털에 올라오는 인터넷 신문도 수시로 읽지만 내가 좋아하는 신문은 종이에 인쇄된 ‘진짜 신문’이다. 책 읽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책이라는 물건 자체를 좋아하는 것처럼 나는 갓 배달된 신문을 들어 올릴 때 느껴지는 두툼한 그립(grip)감과 테이블에 널직하게 펼쳐 놓은 신문지의 얇고 부드러운 질감과 이 좋다.


신문은 무척 양질의 종이로 만든다. 신문지는 엄청나게 얇은 두께이지만 작은 글씨를 빼곡하게 인쇄를 하여도 잉크가 번지거나 반대면에 비추지 않고, 두께에 비하여 잘 찢어지지 않으며 오랫동안 보관이 가능하다.


나는 주로 파란색이나 빨간색 볼펜을 들고 신문을 읽는다. 주위를 끄는 기사의 제목에 동그라미를 치거나 기억할만한 내용에 밑줄(혹은 옆줄)을 긋기도 하고, 갑자기 떠오른 생각들을 신문 여백에 적거나 괜스레 광고에 나온 사람 얼굴에 낙서를 하기도 한다. 살짝 녹은 얼음 위에서 스케이트를 타는 것처럼 볼펜이 신문지 위를 부드럽게 미끄러지는 느낌이 좋다.


ii.


‘신문을 집에 영원히 쌓아 두어서는 안된다’라는 규칙은 누가 만들었을까. 그런 규칙이 정말 존재하느냐고? 그런 규칙은 분명 존재한다. 나는 이 규칙을 모른 탓에 한동안 집에 오는 신문들을 차곡차곡 모아둔 적이 있다. 역시 한달도 안되어 ‘너는 그런 규칙도 모르냐’라는 잔소리를 들으며 그동안 모아 놓은 무거운 신문 뭉치를 폐지 수집 박스에 집어 넣어야 했다.


집에서 만든 밀주의 판매는 불법이지만 허가 받은 주조 공장에서 만든 술은 시중에 유통될 수 있는 것처럼, 개인은 신문의 영구 소장이 불가하지만 도서관은 신문을 장기간 보관할 수 있는 ‘허가’를 지니고 있다. 우리가 몇 달이 지난 신문을 도서관에서 찾아 볼 수 있는 이유이다. 하지만 도서관 조차도 신문을 영원한 소장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도서관에는 이름도 못들어본 별별 신문사들의 신문까지도 월별로 묶여 차곡차곡 보관되지만 이들이 지하 창고를 가득 채울 정도로 쌓이면 도서관장의 사인 하나로, 신문들은 마치 조폭영화의 한 장면처럼 조용히 끌려 나와 뒷골목 어딘가에서 ‘처리’된다.


나는 불살라지는 신문의 운명을 가엽게 여겨 매일 아침 내 앞에 펼쳐지는 수 많은 기사들 중 가장 마음에 드는 몇 개를 골라 스크랩을 한다. 신문을 영구 소장하여서는 안된다는 규칙 탓에 모든 활자를 구할 수는 없지만 그 중 몇 개를 스크랩북 속에 숨기어 그들의 생명을 연장시켜주는 것이다.


iii.


나는 ‘활자 중독증’을 지니고 있다. 활자 중독증이란 한동안 활자를 보지 않으면 불안해지는 증상이다. 나와 비슷한 증상이 있는 사람들은 화장실에 가서도 무엇이든 읽지 않으면 ‘큰일’을 보지 못한다고 하나, 나는 이십여년 전 신병훈련소의 첫 일주일을 제외하고는 지금껏 ‘큰일’을 보는 데 별반 어려움을 겪어 본 적이 없고, ‘활자의 부재’ 따위도 나의 ‘큰일’을 방해한 적이 없다. 다만 나도 큰일을 보러 갈 때면 무언가 읽을 것을 손에 들고 화장실에 들어간다. 일종의 요식행위이다. 두어 줄도 읽기 전에 나는 깔끔하게 일을 마치고 화장실을 나선다.


활자 중독자들은 돈을 주고 활자를 사 모은다. 읽지도 않을 책을 꾸준히 사 모으는 것은 활자 중독자들에게 자주 보이는 ‘활자 수집’이란 증상이다. 활자 수집의 증상은 쇼핑 중독과 비슷한 면이 있다. 쇼핑 중독자들이 필요도 없는 물건을 사 모으거나 쇼핑센터에 가면 마음이 편해지는 것처럼 활자 중독자들 읽지도 않을 책들을 사 모으면서 서점에 가면 왠지 마음이 편하다. 활자 중독자이면서 가성비를 심하게 따지는 나에게 신문은 그야말로 최고의 ‘종합선물세트’이다. 책 한 권 살 돈이면 한 달 내내 넓은 종이 위에 빼곡하게 인쇄된 활자들을 매일 아침 볼 수 있고 게다가 아침마다 집 앞으로 배달도 해주니 신문이 가진 활자의 가성비란 실로 어마어마하다.


나는 한 때 하루에 일곱 개 이상의 신문을 읽던 적이 있다. 경제 신문 두 개와 일간지 두 개를 구독하고 출근하면서 전철역 앞의 무료 신문을 세 개씩 챙겨 읽었다. 당시 아침 시간이면 전철역 앞에서 나누어 주던 무료 신문들은 꽤나 괜찮은 수준이어서 대형 신문사에서 다루지 않는 시시콜콜한 정보들을 얻을 수 있었다. 당시는 ‘셀러던트(salaryman +student)’라 불리는 직장인들이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 트랜드이던 시절이라 거의 모든 신문의 한 켠에는 외국어 공부를 위한 코너가 실려 있었다. 일어, 영어, 중국어, 그리고 한자 혹은 국어의 맞춤법 등이었다. 아침 시간에 좋은 공부 거리였지만 그 양이 제법 많았다. 매일 오려서 모으니 금새 왠만한 영어사전만큼 두꺼워졌다. 매일 새로운 내용을 쫓아 가기도 벅찬 데 복습이란 소원한 일이었다. 어느 일요일 아침 그 주에 모아 놓은 신문지 뭉치와 함께 이 부담스러운 외국어 코너 묶음을 슬쩍 ‘처리’해 버렸다.


iv.


간혹 ‘요즘같은 시대에 왜 구지 돈을 들여가며 종이신문을 읽느냐’고 물으시는 분이 있다. ‘도둑이 제발 절인다’고 내가 ‘구시대’이어서가 아니라고 항변하며 (아무도 묻지는 않았지만) 온라인 신문과 종이 신문을 비교하여 내가 종이 신문을 좋아하는 설명하련다.


1) 인터넷 혹은 인터넷 신문과 종이 신문을 비교하면 정보를 얻는 것으로만 따지자면 구글신(God Google)만한 분이 없지만, 종이 신문은 정보를 제공하는 동시에 스스로의 속도로 생각할 수 있게 해주는 장점이 있다. 아날로그가 가진 장점이다. 책을 읽다 감동스러운 부분이 나오면 잠시 책을 덮고 생각에 잠겼다가 혹은 다시 읽던 문장으로 돌아오 듯이 신문의 인쇄된 활자는 멈추어 생각하고, 읽던 곳으로 다시 돌아와 읽는 ‘적극적인 독해’가 온라인 매체에 비하여 수월하다.


2) 온라인 포털에 모아 놓은 기사를 읽으면 관심이 가는 기사를 골라 읽을 수 있는 대신 나머지 관심 밖의 정보는 제한적으로 접하게 되는 반면, 종이 신문은 첫 페이지의 헤드라인부터 마지막 연재 소설의 제목까지 빠짐 없이 눈에 들어 오는 인쇄 매체의 특성으로 자의반, 타의반으로 정보의 편식을 방지할 수 있다.


3) 선택한 기사를 드레그(drag) 해가며 읽어야 하는 인터넷 신문이 일단 선택한 기사로 시선을 제한한다면, 종이 신문은 지면의 기사와 기사 사이를 넘나 들며 다른 기사로 시선을 쉽게 옮겨갈 수 있다. 즉 읽다보니 재미없는 기사를 재빨리 벗어나 신문지 반대편 구석의 기사로 순시간에 시선을 옮겨 읽을 수 있다.


물론 종이 신문은 각 신문사 별로 정치적 편향성을 지니고 있고 편집 의도에 따라 정보가 선별적으로 전달되는 단점이 있다. 어떤 이는 이런 단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전혀 성향이 다른 신문을 두개 이상 동시에 보아야 한다는 데, 나는 그런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누가 자기 돈을 주며 ‘남의 편’ 신문을 구독하겠는가.


우리나라처럼 진영구분이 뚜렷한 나라에서 ‘균형잡힌 관점’이란 애초에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나마 각 진영의 다양한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다면 차라리 서로 다른 진영의 논객들이 진행하는, 합리적인 논조의 팟케스트나 유튜브를 들어 보는 것이 방법이 되리라 생각한다. (나도 한 번 해 볼까 생각 중이다.)


v.


신문을 읽는 일은 즐거우면서도 유익하다. 특히 나에게는 빠뜨릴 수 없는 삶의 즐거움 중 하나이다. 일본에 살며 가장 아쉬운 일 중 하나는 단연 한국어 신문을 자유롭게 보지 못하는 것이다. 매일 아침 ‘일본경제신문’을 식탁에 펼쳐 놓고 ‘옆 줄’을 그어 대지만 모국어 신문을 서너개를 겹쳐 놓고 훑어보던 재미에 비할 바가 못된다. 한국에 들어가면 일본에서 못 먹는 한국음식을 원없이 먹고 돌아오는 비행기에서는 신문을 열 부 쯤 챙겨 본다. 일본에 오기 전 한국에서 구독하던 몇 개의 신문은 비행기 안에서 읽었더라도 챙겨 와서 집에서 다시 한번 꼼꼼히 읽는다.


글을 쓰다 보니 문득 걱정되는 일이 생겼다. 나처럼 집에서 신문을 받아 보는 사람들이 줄어 어느날 종이 신문이 사라지면 어쩌나. 인건비 상승과 인력 부족으로 편의점도 영업시간을 단축한다는 데 배달원이 부족하여 어느날 신문이 집까지 배달되지 않으면 어쩌나. 신문 값이 치솟아 도서관에나 가야 신문을 볼 수 있게 되면 어쩌나. (낙서를 하며 신문을 볼 수 없을 테니)


(사족을 붙입니다) --------

무엇인가 머릿속에 있는 생각을 글로 쓰고 싶은 데 시간이 없어 글로 옮기지 못하는 날이 있는가 하면 시간은 넘쳐나는 데 아무래도 글이 써지지 않는 날이 있다. 오늘은 그런 날이다.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글쟁이가 쓴 글쓰기에 관한 책에는 오늘같이 글이 써지지 않는 날 책상 앞에 앉아 써지지 않는 글을 붙잡고 있기 보다는 밖으로 나가 글쓰기와 전혀 상관없는 일을 하면서 다시 무언가 쓰고 싶은 기분이 들 때까지 기다리라고 쓰여있다. 하지만 나 같이 글쓰기에 습관이 붙지 않은 초심자가 책상을 떠나 밖으로 나섰다가는 결국 다른 재미에 빠져 다음 날까지 책상으로 돌아오지 못하기 십상이다.


그래서 나는 글이 써지지 않을 때면 신문을 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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