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알라룸푸르 출장 1일

쿠알라룸푸르의 추억

by 박종호

수 년 전의 일이다. 나는 아이들과 함께 쿠알라룸푸르에 여행을 왔다. 우리는 이곳에서 출발하여 페낭과 랑카위까지 3주간 말레이시아를 여행을 했다. 쿠알라룸푸르 도심의 호텔을 잡았다. 별이 네 개 붙어있는 꽤 좋은 호텔이었다. 당시에는 두 딸이 아직 어려 더블 룸을 하나 빌리면 네 식구가 함께 묵을 수 있었다.


방에 들어서니 전망이 탁 트였는 데, 문제는 정면에 높은 고압 전신탑이 떡 하니 서 있었다. 전신탑 주변에는 강력한 전자파가 나와 인체에 해롭다는 말을 나는 한번도 사실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거대한 철재 골조가 드러나 있으니 보기에 삭막하고 고압선이 지나가면 다른 용도로 개발되기 어려우니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려니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나의 호텔 방 바로 앞에 전신탑이 있으니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남들이 믿으면 미신이라고 생각했던 일들도 자기 눈 앞에서 벌어지면 자연스레 믿게되는 법이다. 전신탑이 인체에 어떤 영향을 끼친다는 것은 과학적인 근거가 희박하다. 그러니 그 피해 사례를 접한다고 해도 매우 심인적인 현상이라고 결론 지을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 원인이 단지 마음에 있다고 하더라도 그로 인하여 어떤 현상이 발생하면 우리는 그 인과 관계를 받아들이게 된다.


나에게 전신탑이 주는 심인적인 현상은 잠이 오지 않고 몸이 찌뿌둥한 것이었다. 물론 긴 비행시간 탓일 수도 있고 더위 탓일 수도 있다. 하지만 눈 앞 있는 전신탑이 먼저 보인다. "보이는 것이 믿는 것이다."는 말은 이런 경우에도 통한다. 보이지 않는 많은 합리적인 이유를 포기하고 나는 눈 앞에 보이는 전신주에서 그 원인을 찾았다. 자정이 넘은 시간에 나는 프론트로 향했다.


당직을 서고 있는 직원이 활짝 웃으며 나를 맞았다. 마흔쯤 되었을까 까뭇한 피부에 짧은 머리를 하고 있는 말레이시아인이었다. 나는 그에게 내가 이 시간에 잠 못 드는 이유를 확신에 찬 어조로 설명했다. 전신탑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전신탑 근처에서는 사람이 살지 않는다. 전자파가 나와 몸에 안 좋기 때문이다. 나는 굉장히 예민한 사람이어서 전신탑이 가까운 방에서는 한 숨도 잘 수가 없다. 혹시 이 호텔에 온 한국 사람이나 중국 사람에게서 이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느냐 하며


그는 굉장히 당황한 얼굴로 자기는 그런 이야기는 처음 들어본다고 했다. 나는 그에게 내가 아니면 평생 듣지 못했을 대단한 비밀을 알려준 사람인 양 다시 한번 강조하여 말했다. 아주 확실히 영향이 있지요. 당신도 조심하는 것이 좋아요. 그는 아 그런가요 하며 방을 바꾸어 주겠다고 했다. 매우 친절한 사람이었다. 그는 마스터 키를 들고 나를 데리고 빈 방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첫 번째 방은 지금 묵고 있는 방과 같은 사이즈의 방이었다. 다만 전신탑이 정면으로 보이지 않을 뿐이지 측면으로 전신탑의 일부가 눈에 들어왔다. 여기는 안되요. 이건 보이고 안보이고의 문제가 이니니까요. 봐요, 전신주가 여전히 가까이 있잖아요. 그는 내말에 수긍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두번째 방을 보여줬다.


두 번째 방도 같은 사이즈의 방이었다. 다행히 창의 좌우를 둘러보아도 전신탑은 보이지 않았지만 침대가 하나여서 네식구가 묵기에는 힘들었다. 나는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우리 방에 아이가 둘인데 이 방은 침대가 하나이니 힘들겠다. 미안하지만 전망이 좋지만 전신탑이 보이지 않고 침대가 둘인 방을 찾아 주면 좋겠다. 나는 전신탑과 멀리 떨어져 잠을 푹 자고 싶다.


그는 할 수 없다는 듯이 나를 세 번째 방으로 안내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우리가 보던 층에서 한참을 올라갔다. 그는 이 방이 마음에 안든다면 자기도 할 수 없다고 말하며 방문을 열었다. 우선 전망이 마음에 들었다. 도심의 전경이 한 눈에 내려 보였다. 침대도 두 개였다. 침실이 두 개로 나뉘어져 있으니 당연히 방 사이즈도 훨씬 넓었다.


그는 어떠냐고 물었다. 나는 당연히 좋지 라고 바로 대답하지 않고 조금 생각하는 척하다가 이 방이라면 좋겠다 라고 염치 없이 대답했다. 너무 좋아서 방에 돌아와 아이들과 아내를 모두 깨울 뻔 했다. 그리하여 다음 날 부터 우리 식구는 더 넓고 더 뷰가 좋은 당연히 전신탑과 멀리 떨어진 방에서 묵을 수 있었다.


방을 바꾸니 정말 잠도 잘오고 몸도 게운했다. 이제 전신탑이 인체에 주는 영향은 나에게 확신으로 바뀌었다. 확신이 아니라면 한밤에 괜한 트집을 잡아 사람을 귀찮게 하고 공짜 업그레이드를 한 샘이니, 나도 그 믿음에 한 치 양보를 할 수 없게 된 처지이다.


오늘 오랜만에 다시 쿠알라룸푸르로 간다. 쿠알라룸푸르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문득 수년전 쿠알라룸푸르에서 한밤에 방을 보여주었던 호텔의 직원이 떠올랐다. 어쩌면 그도 전신탑을 볼 때 마다 나를 떠올릴지도 모른다. 새로운 집으로 이사를 간다면 저신탑과는 거리가 먼 곳으로 이사를 할지도 모르겠다.


그는 무슨 사연이 있었는 지 왼쪽 팔이 없었다. 의수를 하지도 않아 그의 양복 소매는 그가 움직일 때마다 앞뒤로 흔들거렸다. 나는 기대 이상의 방을 내어준 그에게 고맙다고 인사하고 그의 이름을 물었다. 그는 자기 이름이 ARM(팔)이라고 대답했다. 정말 어릴 적부터 이름이 ARM이었는 지, 아니면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 스스로 붙인 이름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와의 한 밤의 만남은 깊은 인상을 남겼다.

아침 일찍이던 비행기가 오후로 연기되고 다시 한시간이 더 연기되어 도착하면 한 밤이다. 같은 아시아라고 생각하지만 한 두 시간이면 도착하는 중국과 일본에 비하면 대여섯 시간의 비행 시간이 걸리는 동남아는 은근히 멀다. 멀리 떨어져 있을 수록 인종과 문화의 이질감도 크게 느껴진다. 하지만 여행이란 그 낯선 느낌 때문에 즐거운 것이 아닐까.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좋은 추억을 만들고, 신선한 영감과 새로운 가능성들을 한껏 마주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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