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인한 봄

by freejazz


< Intro >

주니어(Junior) 시절의 나에겐

봄은 늘 시련(試鍊)의 시기였다.

그해 봄 출장지에서의 이른 새벽,

평택항(平澤港)에서 불어오던 봄바람은

유난히도 차가웠다.



< a >

월요일 새벽에 파견근무 가서

화요일 밤엔 철야(徹夜) 근무하다

수요일 점심시간이 다 되어 집에 돌아와

잠깐 눈 붙이다 결국 밤까지 쭉 이어서 자고,

목요일 새벽에 다시 자동차(自動車)를 운전해서

아무 생각 없이 서해안 고속도로를 쌩쌩 달리다가

초봄의 찬공기에 번쩍 정신을 차리니 벌써 서평택 IC.

출장지에서조차 끊이지 않고 쏟아지던 업무는,

위의 문장을 적당한 곳에서 마침표로 끝내지 못하고

계속 이어 쓸 정도로, 길고 또 길었다.

그 주엔 주말 근무까지 하면서 정말 악착같이 버티다

일요일 새벽 한 시가 다 되어서야 겨우 집에 도착.

그런데, 일요일은 정말이지 하루 종일 잠을 자고 싶어,

그래서, 벌레처럼 누워서 계속 잠을 자다 보니

어느덧 오후 3시 무렵.



< b >

다음날, 일주일만의 본사(本社) 복귀 후엔

매일 아침 평균 7시 20분 출근에

매일 저녁 평균 20시까지 근무

혹은 19시 무렵부터 업무적인 술자리 시작.

전날 업무적인 술자리가 있던 날도

예외 없이 저녁엔 또 업무적인 술자리.

다음 날도 또 그다음 날도 술, 술, 술.

술에 절어 술기운이 아니면

도저히 일할 수 없었던 그때 그 시절.

그때부터 나는 대기업(大企業) 병(病)에 걸렸던 걸까.

규정과 지침에만 집착해서 대충 구색(具色)을 맞춘

근거만 남기고, 어떻게든 빨리 일을 끝내려 했다.

소신(所信) 같은 건 저 멀리 던져놓고

열정(熱情) 같은 건 쓰레기통에 버려야

이 조직의 속도(Speed)에 어떻게든 맞출 수 있었다.

하지만 내 속에 여전히 남아있던

인간적인 신념(信念)과 윤리의식(倫理意識) 탓에

내적갈등(內的葛藤)은 날이 갈수록 점점 심해졌다.

그런데 회사의 술자리는 항상 왁자지껄한 분위기였고,

웃고 떠드는 사람들 속에서 나는 늘 정신줄을 놓았다.

물론 대부분은 내가 원해서 참석한 술자리는 아니었지.

그러나 반강제적(半强制的)으로 참석을 강요당했다.

그렇지만 거의 매번 술값은 우리 회사 사람이 아닌,

협력업체 직원이 그들의 법인 카드로 지불(支拂)했다.

그래서 그랬는지, 나는 술기운이 올라와도

내가 사인해서 넘긴 서류의 숫자가 불현듯 떠올랐다.

내가 과연 업무를 제대로 처리한 게 맞았는지.

DDP 조건이었으니, 하역 후 내륙운송비가 붙고

관세가 포함됐고 어쩌고… 아, 근데 잘 모르겠다.

1차 술자리가 파한 뒤엔 반강제적으로 모두가

2차 술자리 장소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순간,

평택항에서 선적하고 하역하던 컨테이너의 영상이

내 머릿속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희미하게 사라졌다.

현장(現場)에선 물류(物流) 흐름이 끊기지 않았고

술자리에선 술과 안주가 끊임없이 제공됐으며,

사무실에선 전화벨 소리가 잠시라도 끊이질 않았다.

다음날 나는 마치 악덕(惡德) 채무자(債務者)가 된 듯

대금지급을 빨리 해 달라는 협력업체 직원들로 인해

피곤해서 녹초가 될 지경이었다.

그런데, 하루 종일 쉬지 않고 일을 해도,

미결업무(未決業務)는 쳐나가면 나갈수록 더 쌓였고

원가분석(原價分析) 상세 내역서(內譯書)는

보면 볼수록 틀린 게 수두룩하더라.

지친 나는 일단 대충 결재(決裁)를 올려놓고

일부 사실 관계가 확인되지 않은 것들을

솔직하게 이실직고한 뒤 겨우 최종 허가를 받았다.

그렇게 나는 사무실 내 자리에서 깊은 한숨만 쉬다

계속되는 내일의 업무를 위해 또 술 한잔을 걸쳤는데,

매우 즐거운 분위기의 반대편 테이블을 힐끔 보다가

갑자기 울컥하고 답답해지는 속을 주체할 수가 없어

술집 화장실에서 쓸쓸하게 웩웩하며 구토를 해대도

그다음 날 아침 7시 30분에 나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어김없이 사무실 책상에 앉아 있었다.



< c >

그러던 어느 날 저녁엔 아주 오랜만에

연차가 비슷한 직원들끼리만 모이는

반가운 회식자리가 있었지.

나의 현재상황을 너무도 잘 이해하고 있는

주위 선후배들이 모두 모이는 자리라

연이은 술자리에도 불구하고 나는

조용한 룸이 있는 식당을 직접 예약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하는 술맛은 유난히도 달콤했다.

심지어 최후까지 남은 네 명은 죄다 술꾼들이라

그렇게 술을 퍼마시고도 모두가 멀쩡해 보였다.

이윽고 우린 마지막 3차 장소인 감자탕집에 갔다.

이후 상당한 양의 소주병이 테이블에 놓였던 것까지는

아주 흐릿하게 기억나는데,

그다음 기억은 사실 가물가물했다.

그렇게 나는 정신없이 집에 돌아와 뻗어버렸고,

짧은 4시간 동안의 단잠 후

다음날 기적적으로 겨우 출근을 했는데,

사고가 터진 건 바로 그때.

전날 같이 술자리에 갔던 옆 부서의 후배가

그날 출근을 하지 못했지.

옆 부서를 담당하는 임원은,

"나 때는 술을 퍼마셔도 지각 한번 한 적 없어!"라고

일부러 크게 호통을 쳤고,

나는 옆 부서에서

"우리 부서 에이스를 술로 죽인 놈"이라고 낙인이 찍혀

지나가는 사람마다

"왜 멀쩡한 애를 술로 죽이냐"는 핀잔을 들어야 했다.

아놔, 나만 그를 술로 죽인 건 아니었는데,

내가 그들에겐 그렇게 만만하게 보였나.

위의 사건은 이십여 년 전 주니어 시절

실무급 직원이던 내가 겪은 실제 상황인데,

세월이 흐른 지금도 나의 직장생활은

사실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

나는 이제 시니어(Senior) 급(級) 직원이 되었지만

아직도, 여전히 그들에게 만만하게 보이는 직원이다.

그리고 이제 출장은 거의 가지 않고

올해부턴 주말 근무도 거의 하지 않지만,

대신 페이퍼 워크(Paper Work)가 그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심(甚) 히 늘어났다.



< d >

세상은 늘 그렇다.

이상하게 뭔가 불공평하다.

그리고 나도 늘 그렇다.

왠지 모르게 매번 나만 일이 많다.

그래서 주재원 때부터 절실하게 느꼈는데

나 때문에 항상 내 가족들만 희생한다.

아, 계속 이러면 안 되는데…

하지만 이제 가족들은 특별히 내색을 하지 않는다.

최근 들어 계속 죽어가는 표정을 하는,

집에서 출퇴근하지만

매일 새벽에 나가고 야밤에 들어오니

얼굴 한번 제대로 보기 힘든

남편 혹은 아빠가 걱정되고 안쓰러워

오늘은 일찍 집에 들어와서 푹 자라고

카톡을 보내주는 아내와 아이들이 눈물 나게 고맙다.

그런데 나는 집에 오면 오히려 그들에게 짜증만 낸다.

그렇게 내가 평소에 소중하게 생각하는 그들에게조차

나는 힘든 얼굴 혹은 불만 가득한 얼굴만 보여주다니,

이게 참, 너무나도 미안한 마음이다.

단지 조금이나마 내게 위안이 됐던 건,

오랜만에 만난 회사 동료들과 공감(共感)하면서

술자리에서 술잔을 부딪히며 같이 한숨 쉬었던 것.

그리고 오랜만에 만난 학교 동기(同期)들의

각자 변해가는 모습과 회사에서 시달리는 모습을 보니

나만 그런 게 아니라는 안도감과 동질감이 느껴져

그나마 참 다행스러웠다는 것.

나도 늙어가고

그들도 늙어간다.

조만간 회사 때려치우고 사업한다는 친구 놈도 있고

아무 계획 없이 곧 퇴사를 결심한 친구 놈도 있다.



< e >

회사에서 늘 쫓기는 듯한 일상에 여전히 불안하고

사내 정치판 한가운데서, 혼자 무표정하게 있거나

혹은 차마 얼굴을 찡그릴 수 없어 할 수 없이 웃는다.

게다가 아무것도 아닌 일에 늘 엄청난 부담을 얹어주는

직장 내(內) 빌런(villain) 같은 임원들과 보직자들이

나는 너무나도 꼴 보기 싫지만.

그래도…

내 쓸쓸한 퇴근길을 마중해 줄,

가끔씩 불러내 술 한잔 할 수 있는 친구들과 동료들,

그리고 이런 나를 믿고 의지하는, 나의 전부인 가족들,

또 내가 편히 쉴 수 있는 소중한 우리 집,

이 모두가 내게 있다는 사실이 나를…

아직 버티게 한다.




< Fine >

그럼에도 불구하고,

2026년의 3월도

한편으론 굉장히 서글프면서

다른 한편으론 매우 춥고 잔인하게 느껴지는 봄이다.



<D.C.>




註)

1) 연주순서

intro-a-b-c-d-e-<D.C>-a-b-c-d-e-<Fine>


2) D.C. : Da Capo

처음으로 돌아가서 반복하고,

마침표(Fine)가 있는 곳에서 끝맺음.


3) DDP(Delivered Duty Paid) 조건

판매자가 지정 장소까지 운송뿐 아니라

수입국 통관과 관세·부가세까지 부담하는 조건




(사진 1) 평택항의 일몰 무렵

* 사진출처 : 평택시

https://www.incheonilbo.com/news/articleView.html?idxno=125763




(사진 2) 감자탕과 소주

그해 봄날 밤에 동료들과 같이 먹었던 감자탕은

사실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감자탕은 늘 푸근하고 또 맛있다.



* 사진출처 : 수원 맛집 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share/18UqXSh9XR/?mibextid=wwXIf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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