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든 직장생활이지만,
누군가와 함께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은
한편으론 꽤나 든든한 느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누군가와 함께 했던 시간 동안에는
저의 살인적인, 빡빡한 업무 스케줄에도
작지만 빈자리를 꼭 마련해 두었습니다.
그렇게 생긴 여백은
저의 의지와 가치관에 따라
무엇이든 채우고 싶은 공간이었는데요.
제가 나름대로 기대했던 건,
정공법(正攻法)으로
부끄럽지 않게 일을 하기 위한
그런 공간이었으면 하는 거였습니다.
그렇게 같이 무언가를 하고
또 그곳에 무엇이라도 채울 수 있어
저는 그 여백에 제가 원하는 이런저런 색들을
부지런히 칠해나갔죠.
그런데 언제부터였는지
그곳에 더 이상은
밝고 투명한 색채를 칠할 수가 없었습니다.
조직이 원하는 결과와 제가 지향하는 방식이
전혀 다른 방향에 있었거든요.
그리하여 주말마다 저는
단골 술집들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 이유는, 그러한 현실을 부정하고 싶어서였고,
또, 어느 지점에서건 결국 계속 서로
충돌할 것만 같은 상황을 피하고 싶어서였습니다.
그래서 어젯밤 꿈속에서는
저의 예전 단골 술집이었던,
지금은 사라진 신촌의 Cafe '섬'에 다녀왔습니다.
'섬'이라고 쓰여있는 간판에서 나오는
은은한 빛으로 인해
마치 푸른 바닷속에 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주던 그곳.
이런저런 스트레스 탓에 저는 계속 잠에서 깨어났지만,
그 간판만은 저에게 너무나도 선명하게 다가왔네요.
하지만 그렇게,
잊으려 잊으려 계속 술을 마시다 보니 어느새,
온통 어둠이 내려앉았습니다.
비어있는 캔버스에는 이제 무엇들이 자리 잡은 걸까요.
나침반을 잃은 항해사가 바라보는 풍경일지라도
그 모습은 여느 때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숨 가쁜 한 주(週)를 지나 이제 비교적 여유롭게
주말을 맞은 오늘 하루는
무엇으로 차오르는 걸까요.
초봄의 연두색 빛깔로 반짝이던 그동안의 업무성과도
어떤 보복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새파란 용기도
그리고 영원할 줄만 알았던 지난해의 황금빛 추억도
어두운 색을 덧칠하니,
아름다울 것만 같았던 제 캔버스에는 온통
검붉은 색들만이 가득하네요.
하지만 아직 빈자리가 많이 남아있습니다.
당신은 어떤 색을 바라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