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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시절(大學時節)

by freejazz


회색빛 강의실에서 내가 8학기 동안 주입당한 건

과학적 관리기법

합리화, 효율화와 최적화

그리고 과업성과의 극대화라는

말하자면 Taylorism.



컴컴한 안암학관에서 내가 새내기 시절 주입당한 건

과학적 사회주의

변증법적 유물론과 노동가치설

그리고 프랑스 혁명사상이라는

말하자면 Marxism.



제도(制度) 교육에 반(反)한다는 대학 교육

그러나

강의실 안에서

또한 강의실 밖에서

제도 교육과 다를 바 없는 주입식(注入式) 교육만이

존재했을 뿐,

그 속에서 지쳐 있던 나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양 극단에서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를 경계선을 들락날락거리며

자본화(資本化)의 접점 어디엔가에 있었다.



대학생이면 누구나 떳떳하게

반미(反美)를 이야기한다고

주입받던 때도 있었지만

어느덧 대학 사회에서의 반미는

시대의 대세(大勢)가 될 만큼

당연한 역사적 사명이 되어버렸지.

대학시절 나 역시

당당했던 반미주의자

하지만...

때론 강요하는 반미보다는

강요하지 않는 친미(親美)가 더 좋을 때도 있었다.

회색빛 색채를 띤 내 모습

때론 검게 때론 하얗게

나를 변신시키고

말도 안 되는 궤변만을 늘어놓은 채

언제나 한쪽에서 다른 한쪽을 측은히 바라보며

나 자신을 위안했다.



자본화(資本化)가 완벽하게 진행되어 가는 것도

어쩌면 시대가 요구하는 필연적(必然的) 과정.

나는 이미 75% 이상 진행된 나 자신의 자본화를

묵묵히 바라보며

결국 혼자

자기 합리화를 시키고

대학은 원래 이런 공간이었을 거라

내 멋대로 추측을 한다.



혼자 대학에 들어와

혼자 대학을 나가고

만나고 헤어지고 만나고 헤어지는 사람들 속에서

결국 혼자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대학시절, 쓸쓸했던 내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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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5월, 대학 졸업(8월 여름 졸업) 직전

술이 몹시 땡기던 어느 날,

맨 정신에 일필휘지(一筆揮之)로 썼던,

이제 와서 돌아보니 다소 부끄러운 글입니다.


저는 뭔가 불편한 마음을 갖고 글을 쓸 때엔

대개 時의 형식을 차용(借用)했는데,

제목 또한

“나무의자 밑에는 버려진 책들이 가득하였다”, 로

시작하는 기형도 시인의 "대학시절"에서

완전히 그대로 가져왔습니다.


흔히, 대학시절은 젊음과 낭만이 함께해서

"인생의 황금기" 라고들 하지만,

사실, 저에게는 이념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었던

어쩌면, 가장 힘든 시기였던 것 같습니다.


새내기가 된 첫날,

무슨 신문을 구독하고 있냐는 한 선배의 질문에

아무 생각 없이, "朝鮮日報"를 본다고 답했다가

두 시간 정도 설교를 들어야 했고.


또, 출신 고등학교를 물어본 다른 선배의 질문에

당시 장안의 화제가 되었던 모교 이름을 답했다가

학교가 속한 지역(서울 서초구 소재) 탓에

사회적 계층과 계급에 대한 연설을

두고두고 들어야 했었습니다.


게다가, 서울 소재 대학이었으나

막상 서울의 변방에 자리 잡고 있어

지방색(地方色)이 워낙 강했던 학교에 들어갔기에

서울이나 수도권 출신들이 각각의 카르텔을 형성해서

어디에도 낄 틈이 없었던 저는,

학교 기숙사에서 거주하던 동기들이나

자취나 하숙을 했던 동기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면서

정체성 혼란을 마구 겪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사실상

어느 계층이나 어느 계급에서도 끼지 못해

양 쪽 사이에서 외로움을 많이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직장생활을 이십 년 이상 계속하고 있으면서도

아직까지도 혼자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있는

지금의 제 모습은,

21년 전 대학 졸업 직전의 제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네요.


하지만, 어느덧 저도 기업 물을 많이 먹어서 그런지

이젠 반미(反美) 주의자는 전혀 아닙니다.


그리고 대학시절, 상대적으로 좌편향이었던 마인드는

이젠 그나마 좌우 균형을 찾은 듯하고,

졸업 직전에 75% 수준이었던 자본화 정도는

이제 100% 로 끝까지 진행되어

시장경제의 완전한 신봉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애덤 스미스가 주장한 보이지 않는 손을,

인위적인 조정이나 유리한 방향으로의 조작이 아닌,

시장을 작동하는 그 손을

이제 굳게 믿다 보니

시장경제를 위협하는 포퓰리즘은 멀리하게 되었네요.


한편, 안암학관 지하에나 조용히 숨어 있다던

우리가 찾던 그 보물 상자는,

저는 아직까지도 여전히 찾지 못했지만

사실 이젠 그 보물 상자가 필요 없어진 나이가 되어

시대를 좀 더 냉철하게 바라보자는 그런 관점에서

다른 보물 상자를 좇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가끔

“마침내 올 해방세상”(바위처럼)이나

“끝이 보일수록 처음처럼”(처음처럼) 같은

노래 가사를 되뇌며,

“끈질긴 우리의 삶을 위하여”(청계천 8가)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대학시절, 우리가 찾던 세상과 보물 상자는

역시 그 찐한 노랫말 속에서나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양 극단으로 심하게 둘로 나뉘어진

이 땅, 대한민국에서

대학시절 흑이나 백이 아닌, 회색빛 색채를 띄었던

제 모습이 다시 오버랩되어 나타났습니다.


문득 돌아본, 싱그러웠던 그 해 5월.

저의 마지막 대학시절까지도 혼자 남겨진 제 모습이

다시 제 눈앞에 선하네요.


만나고 헤어지고 만나고 헤어지는 사람들 속에서

결국 혼자 살아가는 법을 배웠던

대학 시절, 쓸쓸했던 제 모습입니다.




첨부한 사진은,

저의 모교에 위치한 ‘다람쥐길’이라는 곳입니다.


이 길은 본관 뒤편에 있는 오솔길로,

학생들에게 지름길로 쓰이는 곳인데요.

이 길에서는 가끔, 뒷산인 개운산에서 내려온

다람쥐들을 만날 수 있었다네요.

그래서 제가 입학하기도 전인 꽤 오래전부터

‘다람쥐길’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길에서 내려오는

슬픈 전설(傳說)이 하나 있어 소개할까 합니다.

그건 바로,

이 길을 함께 걷는 남학우와 여학우가

다람쥐를 만나면 사랑이 이뤄지지만,

이미 연인(戀人) 사이인 남녀가 함께 걷다가

다람쥐가 아닌, 청설모를 보면

연인 사이가 깨진다는 슬픈 전설(傳說)입니다.


하지만, 요즘은 이 다람쥐길에 고양이가 출몰하면서

아쉽게도 다람쥐를 보기 어려워졌다고 하는데요.

그래서, 대신 이 길에 언젠가부터

귀여운 다람쥐 동상이 생겼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계절마다 바뀌는

다람쥐 동상의 의상을 보는

그런 재미도 생겼다고 하는데요.

아무튼, 다람쥐길은 가끔 지치기도 하는 학교 생활에서

조금이나마 여유를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여전히 많은 학우들에게 사랑받고 있다고 합니다.



‘다람쥐길’ 전설(傳說)의 출처 : 고대신문(高大新聞)

(http://www.kunew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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