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종로에서 경복궁으로
그리고 경복궁에서 사직동으로
어렸을 적의 향수(鄕愁)를 잔뜩 떠올리게 하는,
여전히 정겨운 도심(都心) 한복판을 걸었습니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해주시던 떡볶이와 흡사한
간장 기름 떡볶이를 먹으러 갔던 그 정겨운 동네.
몇십 년째 계속 그 자리에서 떡볶이를 파시는,
개성(開城)이 고향이라던 할머니의 떡볶이도 먹고
또 마지막엔 입가심으로 가래떡도 먹었습니다.
게다가 오늘은 금요일 저녁이라!
시장골목을 그냥 빠져나갈 수 없다는 생각에
근처에 사는 대학 후배를 꼬셔서
돼지 머릿고기에 막걸리도 한 잔 마셨네요.
사실 말이 도심 한복판이지
청와대와 경복궁 주변의 서촌(西村) 지역은
아직도 낙후된 분위기를 고이 간직하고 있는,
개발(開發)이 덜 된 곳입니다.
아니, 개발을 할 수 없는 곳일지도 모릅니다.
청와대 주변이라 개발제한이 많고
또 주변의 고궁(古宮)들과 같은
한양(漢陽)의 문화유산(文化遺産) 덕분에
고층건물이 올라갈 수도 없기 때문이죠.
물론, 고층건물들이 합법적으로 들어설 수 있는
주변의 경계 지역에는 이미
여러 대기업들의 건물이 들어서 있긴 한데요.
그래도 아직까지 꼬불꼬불 이어진 골목길의
한옥집들 속에서 저는,
어린 시절의 추억을 찾아
술 한 잔을 걸친 상태로 잠시 산책을 했습니다.
2.
도심 속의 작은 그 동네에는
그냥 왠지 모르게 정(情)이 넘쳐나는 것 같았습니다.
아파트 단지에서는 볼 수가 없는,
그런 후미진 골목에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소리와
알지 못하는 행인들의 모습조차
정감(情感)을 가득 담은 것 같더라고요.
우리가 술을 마셨던 시장골목의 그 술집에서
금요일 저녁에 늦은 퇴근을 한 직장인들이
동료들과 직장인의 애환(哀歡)을 나누는 듯한
편안하고 정겨운 모습도,
그리고 연인(戀人)으로 보이는 젊은 남녀가
일주일 간 쌓인 힘들었던 일들을 이야기하며
서로를 달래주고 있는 듯한 따뜻한 모습도
모두 그리움이라는 이름의 영상(映像)으로
제 마음속에서 오래도록 기억이 될 듯합니다.
추억(追憶)의 서촌길.
이상(李箱)의 집을 지나
통인시장(通仁市場) 입구로,
그리고 윤동주 하숙집을 거쳐
수성동계곡(水聲洞溪谷)까지 펼쳐지는
인왕산(仁王山) 자락의 따뜻한 기운이,
한양도성(漢陽都城)의 불빛을 따라
유난히 밝게 느껴지던 그 여름날의 영상(映像).
3.
밤은 깊어갔지만, 서촌의 풍광(風光)은
서울의 그 어느 동네보다 아름다웠고,
그 동네에 거주(居住)하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그 동네에 잠시 쉬러, 술 마시러, 그리고 대화하러 온
다른 동네 사람들까지도
모두 다 정인(情人) 같았습니다.
우리는 조미료가 잔뜩 들어간 음식에 익숙해서
맵고 짠 떡볶이가 익숙하고 맛있게 느껴지지만,
사실, 조미료가 빠진 단순한 간장 기름 떡볶이가
더 깊은 맛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잊고 살지요.
서촌은 제게 늘 그렇게
깊은 맛을 느끼게 해주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무더운 여름밤이 계속되지만,
이렇게 옛 추억에 잠길 수 있는
서울의 정겨운 거리를 걸어보니
오랜만에 풋풋했던 시절의 여름 내음을
다시 맡아볼 수 있었습니다.
#.
한편, 이 글의 배경음악은,
브라운 아이즈의 "언제나 그랬죠"로 하겠습니다.
2001년 6월, 소울(Soul)을 가득 담은
따끈한 데뷔 앨범 한 장으로 그 해 여름 가요계를
조용히 초토화(焦土化)시켰던 그들은,
시간이 흘러가도 2001년 여름을 기억하게 하는
마성(魔性)을 갖고 있는 게,
어쩌면 서촌의 그 한결같음과도 비슷한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그들의 데뷔곡, "벌써 일년"에서 말하고자 했던
"벌써 일 년이 지났지만..." 이라는 가사와 멜로디에선
일 년이 지나고 십 년이 지나고 이제 이십 년이 지나도
한결같은 그들의 자연스러움이 묻어 나왔고,
9월 이후 발표한 그들의 후속곡 "With Coffee" 의
"부드러운 커피 향보다 더욱 진하게..." 라는 가사와
떨리던 음성은 그 시절의 풋풋함 그 자체였습니다.
그리고 "후속곡의 후속곡"인 "언제나 그랬죠" 에선,
"내 오랜 기억에 기다림에 새하얀 편지로 남겨진
그댄 언제나 나와 함께 있었죠." 라고 속삭이는
감성(感性)적인 가사와 멜로디가 특히 돋보였는데요.
그건 그때 그 시절의 "그리움" 그 자체였습니다.
특히, 이 곡은 영화의 OST에 포함되지 않았음에도
"버스, 정류장" 이라는 영화의 주요 장면을
M/V(Music Video)에 넣었는데요.
그래서 저도 서촌의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다
오랜만에 이 노래를 플레이 리스트에 넣어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반복해서 들었습니다.
경복궁에서 시청까지,
그리고 시청에서 남산 소월길을 구불구불 돌아
한남대교를 건너 강남(江南)으로 올 때까지
무한반복되던 그 노래로 인해,
서촌에서 본 그 따뜻했던 풍광이
그리움이라는 이름의 영상(映像)으로
제 머릿속에 한동안 깊게 남아 있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