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과 자본(資本)

소주는 독해야 제맛이지

by freejazz


1.

신년 둘째 주 금요일 저녁부터 늦은 밤까지

동국대학교 후문 충무로 5가 인근에서

대학교 선후배들과 오랜만에 만나

신년회를 겸(兼)해서 술자리를 가졌다.

음주 전부터 대학가(街)의 술집 분위기에 취했는지,

대학생 때 느낌으로 저렴하게 국밥집부터 시작했다.

1차로 술국에 소주를 마시다 보니 기분이 썩 좋아져서

2차로 막걸리에 파전으로 계속 달리고

3차로 소주에 라면으로 마무리했다.

그러니까 1차는 음식과 술의 조합인데,

2차와 3차는 술과 안주의 조합이었지.

그런데 그러다 그것도 모자라 옆테이블에 앉았던,

동국대학교 역사교육과에 재학 중인

막 복학한 파릇파릇한 대학생들과

잠시 합석을 하기도 했다.

막걸리도 팔고 소주도 팔고

또 각종 안주에 라면까지 파는 술집에서

젊은 술친구들을 만났던 충무로는

오랜만에 술을 거하게 마셔서 그랬는지,

참으로 정(情)이 넘쳐나는 곳이었다.

이상하게 나는 매번 술(酒)을 들이켜면

결괏값이 항상 정(情)으로 나온다.

Input과 Output의 인과관계는 분명

주(酒) → 취(醉)가 맞는데, 왜 나는 매번

주(酒) → 정(情)이 되는지, 잘 모르겠다.



2.

한편, 1차로 들어간 술국집에서

창가 쪽 테이블에 앉아 창밖을 보니

밖에 나가 삼삼오여 모여 담배를 피우던

학생들이 유난히 내 눈에 들어왔다.

젊고 예쁜 학생들이어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 쌀쌀한 날씨에도

짧은 반팔티에 청바지 차림으로

밖에서 담배를 피우던, 여대생인 것 같은 분을

어쩌다가 물끄러미 바라보게 되었는데,

(아, 오해는 마시길, 다른 어떤 의도도 없었으니까.)

그녀의 담배 한 개비가 다 태워질 때까지 나는

16도의 참이슬 fresh가 아닌

20.1도의 참이슬 오리지널(클래식)을

두 잔 정도 들이켰다.

그런데 밖에서 담배가 타들어가는 것처럼

안에서는 소주가 내 목젖을 타들어가는 느낌을 주며

빠르게 내 몸속으로 흐르더라.

"나는 16도짜리 소주는 취급 안 해요."

"왜냐고요? 16도는 너무 순하거든요."

나는 눈빛으로 이런 메시지를 보내며

힐끔힐끔 창밖을 쳐다보니

역시나 그녀도 말보로 라이트가 아닌

말보로 골드를 피우고 있더라.

나는 선천적으로 폐가 예민하여 (뭐, 그런 거 같다.)

담배를 피운 적이 한 번밖에 없지만 (군대에서 강요로)

이상하게 술 마실 땐

담배를 피우는 젊은 여성이 그렇게도 멋있어 보였다.

물론 이건 나라는 술꾼의 아주 독특한 취향이긴 한데...

하지만 그래도, 나는 술김에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소주도 담배도 독해야 제맛이지.



3.

1월 초였지만 날은 생각보다 춥진 않았다.

새벽녘 조용히 살짝 비가 내리던 귀갓길.

택시를 잡으려다 보니

문득 오래전 내가 복학생이었을 때가 떠올랐다.

학교 사람들을 만나면

술자리는 그때나 지금이나 변한 건 없다.

언제나 술을 엄청나게 퍼마시고

어떨 땐 소주 몇 병을 한 시간 반 만에 해치우는

그런 무식한 음주습관은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없다.

단지, 때로는 무엇보다 앞선다고 생각하는

자본(資本)의 논리를 술잔에 타 마시는 것 정도가

달라졌다면 달라진 것인가.

또한 이제 더 이상 특정 정당(政黨)을

지지(支持)하지 않는다는 것이

달라졌다면 달라진 것인가.

그런데 우리는 언제부터

만 원짜리 몇 장으로 맥주잔을 감싸고

혹은 오만 원짜리로 길게 막대기를 만들어서

소주잔을 휘젓고 또 맥주잔에 타먹고

하기 시작했던 것일까.

(아, 실제로 그랬다는 건 아니다. 그냥 상상 속에서…)

언젠가 내 머릿속에서 자본화(資本化)가

완벽하게 진행되기 시작한 순간,

솔직히 나는 모든 것을 돈으로 환산하기 시작했다.

그 가치를 어떤 금액으로 책정하기 시작했던 순간,

나는 어떻게 돈을 벌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만

고심하고 또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대학을 졸업한 직후에도 나에게

노동(勞動)을 앞세운 정당에서 당비를 내라고 했을 때,

그러면서 연말정산 때 기부금 영수증을 내면 된다고

나를 계속 꼬드겼을 때,

솔직히 나는 "당신들도 자본주의를 먹고사는 거잖아!"

라며 크게 소리치고 싶었다.

그렇지만 진짜 그렇게 할 수는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날 나는 그냥 조용히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그때 그 기부금 영수증은

잊지 않고 생애 첫 연말정산 서류에 집어넣었다.

그 이후부터 나도 그렇게 말과 행동이 엇나간다.

하지만 이젠 대통령도 막말하는 세상이고

자본이 아닌 노동(勞動)을 앞세운 정당도

돈을 내라고 강요하는 세상이다.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자본의 논리 앞에서는 글쎄,

내 머리에서 나오는 모든 결론은 돈일 것이다.

그렇게 언젠가부터 나는 자본을 전제로만

생각하고 판단하게 되면서

그쪽 편의 그들을 무심히 그냥 바라보고만 있다.

그래서 이젠 나도 침묵으로만 일관하는 세상이다.



#.

본격적으로 사회생활을 하면서

답답한 가슴을 매번 술로 적셔오던 나는

가끔 막 복학한 대학생 때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해 겨울엔 눈이 참 많이 내렸었는데...

그런데 지난 주말엔

맘 놓고 술을 퍼마셔서 더 그렇게 느꼈는지,

서울의 밤거리는 참으로 따뜻했다.

1월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그해 겨울은 참 추웠는데...

소주는 독해야 제맛이고

겨울은 추워야 제맛인데 말이야.




(참고 1) 글의 작성 배경 설명

이 글은 2026년 1월 17일 토요일 새벽에

충무로에서 택시를 타고 무사히 귀가한 뒤

이런저런 걱정 때문인지 주취(酒醉) 중에도 불구하고

잠을 이루지 못한 탓에 초안(草案)을 썼다가

그 주 토요일 오후에 일부 문장을 다듬고 수정을 한,

그래서 썩 마음에 드는 글은 아니다.

하지만, 그래도 그때의 그 감정을 남기고 싶어서

살짝만 글을 다듬어서 발행해 본다.

대학가에서 대학생들을 만나 마치 나도 대학생인 양

말도 안 되는 착각을 해서 그랬는지 나의 복학 직후

겨울의 추억이 오랜만에 다시 생각났다.

게다가 취중진담(醉中眞談)이라고,

평소엔 내뱉지도 못하고 쓰지도 못할 표현들을

아주 거침없이 토로하며 누군가에게 하소연한 것 같아

스스로도 참 어처구니가 없다는 생각이었다.

히지만 그래도 또 언제 이렇게 술 한잔 한 뒤

이상(異常)하고 자조적(自嘲的)인 글을 써보나 싶어서

기록(記錄)을 위해 보존(保存)해 두려고!

조심스럽게 글을 예약 발행해본다.



(참고 2) 피하고 싶은 음주문화 (※ 출처 별도 표기)

(※ 사진 및 출처 : 2016년 삼성 그룹 페이스북 페이지)


삼성 그룹에서 <피하고 싶은 음주문화>를 조사한 결과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문화는 술 강요(48%)였으며

이러한 분위기로 인해 술 자체가 싫다는 의견이

14%로 2위를 차지했다.



(참고 3) 참이슬 도수 관련

(사진 출처 : https://v.daum.net/v/20221231000014320?s=print_news)


참이슬 fresh는 2006년 최초 출시 時 19.8도에서

2014년엔 18.5도로 도수가 낮아졌고

이후 도수가 지속 낮아지며 16도 대로 진입하였다.

그리고 최근엔 16.5도에서 16도까지 낮아졌으나

참이슬 오리지널(클래식)은

2012년 이후 계속 20.1도로 도수를 유지 중이다.




(참고 4) 참이슬 오리지널 (※ 이른바 빨간 뚜껑)


(사진 출처 : KNN 뉴스 및 Netflix)


나는 이 글을 쓰기 직전에서야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 시즌2"의

마지막 회를 시청했다. (공개일 : 2026년 1월 13일)

그러니까 그날 술자리에선, 최강록 셰프의

이른바 "빨뚜" 스토리는 전혀 알지 못했던 상태였다.

그래서 평소와 다름없이 신년회를 했던 그 식당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참이슬 오리지널"을 주문했었다.

그런데 그때 주변에서,

"최강록"과 "빨뚜"를 하도 얘기해서 (하아...)

이미 당할 대로 당한 "스포(Spoiler)"에도 불구하고

다음날인 토요일 낮에 술이 덜 깬 상태로

"흑백요리사 시즌2"를 넷플릭스를 통해 시청했다.

결승전에서 그가 "나를 위한 요리"에서 내놓은 소주

이른바 "빨뚜"라 불리는, 그 참이슬 오리지널

노동주, 취침주라 명명(命名)되면서

힘듦과 고됨을 한방에 날리기 위한 그냥 술이라 했다.

고생한 나를 위한 노동주 한 잔이라...

그런데 나도 딱 그랬다. 고생한 나를 위한 술 한잔.

내가 팍팍 넘겨마신 그 빨간 뚜껑의 독한 소주 한잔.

그날 나는 전날 마신 술이 다 깨지도 않았던 상태로

대낮부터 냉장고에서 그 참이슬 빨간 뚜껑을 꺼냈다.

최강록 셰프의 소름 돋는 완벽한 서사(徐事) 앞에선,

나 역시도 소주잔에 술을 채우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연초부터 이게 웬 청승이냐"라고

누군가는 뭐라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건 나에겐 중요한 게 전혀 아니었다.



(참고 5) 2026년 1월 3주 차의 날씨 (※ 연이은 한파)


이 글을 쓴 2026년 1월 17일 토요일 새벽엔

분명 늦가을의 쌀쌀한 느낌 정도의 날씨였는데,

이 글을 쓴 다음 주인 1월 19일 월요일 출근길부터

거짓말처럼 엄청난 한파(寒波)가 시작되었다.

한낮 최고기온조차 영상 2도를 넘지 않는,

사실상 온종일 영하권의 강추위가 시작되었는데,

"겨울은 추워야 제맛인데 말이야."라고 중얼거리던

나를 비웃기나 하듯 극강의 추위가 서울을 강타했다.

그러자 한강(漢江)의 첫 결빙(結氷)도

평년에 비해서는 일주일 정도 빨리,

그리고 작년에 비하면 37일이나 앞당겨졌다고 한다.

물론, 이런 추위엔 어려운 이웃들은 더 힘들다.

그런데, 어제(2026년 1월 23일) 밤늦은 퇴근길엔

-10℃ 안팎의 혹한(酷寒)으로 인해

눈이 정말 너무나도 예쁘게 내렸다.

그래서 나는 집에 거의 다 왔던 때에

동네 아파트 단지 입구에서 잠시 넋을 잃고

내리는 눈을 하염없이 바라보기도 했다.

그래서 그랬는지,

사실 한편으론 이게 참 철없는 말일수도 있겠지만,

역시 겨울은 추워야 제맛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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