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의 기억
아담한 초록 풀밭과
회색 콘크리트 바닥
그리고 그 중간에 비치된
오래된 나무 벤치 두 개
아, 그리고 또 뭐가 있었더라.
음... 그래, 그게 있었지.
이젠 사라진, 추억 속의
민트색 공중전화 부스(booth).
노란 가로등이 켜지고
짙은 어둠이 내리면
그곳은 누렇게 바랜,
오래된 사진엽서가 된다.
아파트 단지 옆 도로의
시끄러운 자동차 소리도
그리고 놀이터에서 뛰어놀던
아이들의 웃음소리도
모두 사라진 저녁 시간이 되면,
갈색의 복도식 구축(舊築) 아파트는
별 하나 보이지 않는
캄캄한 서울 하늘을 대신해서
제법 모양을 갖춘 별자리가 된다.
아파트의 경비 아저씨는 말없이
오렌지색 불빛 손전등을
휘휘 내두르며 걸어가고
맞은편에 다정하게 손을 잡고
산책하는 노부부의 머리는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을 나타내듯
반백(半白)으로 세어 있다.
나는 오래된 나무 벤치에 걸터앉은 채
고개를 들어 앞을 올려다본다.
복도식 구축 아파트의
불빛으로 만들어진 별자리에서
나는 어렵지 않게
그 아이의 별을 찾을 수 있다.
나는 나만의 그 별을
깜짝 놀라게 해 주고 싶었다.
그 시절로 잠시 돌아가니,
회색 콘크리트 바닥을
열여섯 개의 촛불로 채운
앳된 모습의 고교 1학년
소년이 보인다.
경비 아저씨는 그저 말없이
미소를 지으며 지켜볼 뿐.
그러면서 그 아이는
방금 막 집에 들어갔다고
그 시절의 내게 살짝 알려주신다.
한편, 늦은 산책을 하던 노부부도
지나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가만히 이쪽을 응시하며
나에게 한마디를 던진다.
"학생, 저 여학생 좋아하는구나."
그러자 화들짝 놀란 나는
그 자리에서 얼음이 되었다.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는데,
몸은 차가운 아이스바 같다.
추억을 떠올리는 내 머릿속에서
그때 나를 스쳐갔던
그 노부부의 모습이
다시금 잠시 떠올랐다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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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나의 고교 1학년 시절.
그해 여름은 참으로 뜨거웠다.
날씨도, 그리고 나의 첫사랑도.
그날이 지나고 며칠 후엔
우리 집이 이사를 가서
나는 더 이상 그 별자리를
가까이서 자주 볼 순 없었다.
그래서 나는 자전거를 타고
간혹 그 동네로 건너왔다.
그런데 언젠가부턴 그 동네에서
낯선 무언가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별자리는 점점 희미해졌고
경비 아저씨도 다른 분으로 바뀌었다.
게다가 첫사랑의 그녀 앞에서
나는 자꾸만 점점 더 작아져갔다.
어느 날 나는
그 민트색 공중전화 부스 옆에
자전거를 세워두고
미리 준비한 동전을
한가득 넣었는데
그녀의 집 전화번호를
차마 누를 수 없었다.
그녀가 다니던 외국어고등학교
동급생으로 보이던 어떤 남학생과
그녀가 불어(佛語)로 대화하는 걸
우연히 그녀의 집 근처에서
엿듣게 된 이후부터는.
그리고 나는 괜스레 후회했다.
쓰잘데기 하나 없는 독일어(獨逸語)를
왜 제2 외국어로 선택했는지를.
마침 내가 다니던 학교엔 나 때부터
처음으로 불어반이 생겼는데,
왜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독일어를 선택해서
그렇게 애를 태우고 있었는지.
뒤늦은 후회였지만,
그땐 또 그게 굉장히 크게 느껴졌다.
물론 내가 불어를 선택했다 하더라도
외고(外高)를 다녔던 그녀와
불어로 대화를 할 순 없었겠지.
하지만 나는 그렇게라도
공통된 무언가를 찾아
그녀와 어떤 접점(接點)을 꼭 만들고 싶었다.
직선과 곡선이, 혹은 평면과 곡면이
만나는 점을 "접점"이라 한다고
수학(數學)의 정석(定石)에서 공부했지.
그래서 그 "접점"을 구하는 문제를
나는 수도 없이 풀었기에
수학에서의 접점은 그리 어렵지 않았는데,
현실에서의 접점은 왜 그리 어렵던지.
게다가 세상 우아하게 들리는 불어와
세상 딱딱하게 들리는 독일어의
크나큰 차이는 어쩌면 우리를
서서히 멀어지게 했을지도 모른다.
Joyeux Noël et Bonne Année
그해 연말 그녀에게 받았던
크리스마스 카드엔
위의 문구가 적혀 있었다.
물론 나도 그 문장의 의미를
대충 유추(類推)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그 문장을
정확하게 해석하고 싶어서
불어반 친구 놈에게 물어봤는데
그 친구는 다음과 같이 적어줬다.
You will soon be heartbroken.
그런데 그 말이 씨가 됐는지
그 아이와 나는 서로 바빠졌다는 핑계로
고2 때부턴 연락이 뜸해졌다.
당시 일반고 남학생이었던 나에게
외고 여학생이었던 그녀는
내가 도저히 넘볼 수 없는
큰 신분차이를 느끼게 했고,
당시 전세(傳貰)로 거주했기에
자주 이사를 다니던 우리 집과
그 비싼 땅에 자가(自家)를 보유해서
이사를 다닐 필요가 없던 그녀의 집은
선명한 계급차이를 고스란히 보여줬다.
나에게 삶은 늘 그랬다.
내가 감히 넘볼 수 없는 무언가를
마음에 품고 사는 순간
심(甚) 히 고달파지는 그런 상태는,
그때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다.
하지만 그래도 나의 첫사랑이 깃든
그 시절 추억의 장소와
그 시절 나만의 마음은
내 기억 속에서 변함이 없기에
언제나 이렇게 그 기억의 한 페이지를
열어볼 수 있다는 것에 만족한다.
오늘은 밸런타인 데이(Valentine's Day).
게다가 곧 음력 설도 오고 있다.
그래서 이젠 나도 좀 불어로
"Bonne Année"라는 말을
우아하게 한번 외쳐보고 싶었다.
비록 아직 스스로에게
살짝 자신이 없을지라도.
2026. 2. 14.
재개발로 완전히 변한 내 추억의 동네를
오랜만에 만나고 온 날 씀.
(사진 1) 프랑스 産 크리스마스와 신년 카드
이미지 출처 : https://www.fastsnail.com/935.html
(사진 2) 세련된 디자인의 프랑스 그림 (대문 사진)
이미지 출처 : https://party.alibaba.com/newyear/how-to-say-happy-new-year-in-fran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