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光)이 빛나는(熙) 밝은 동네의 어두웠던 뒷골목
1999년 "광희동"(光熙洞) 연작시(連作詩) 中
기억을 되살려 다시 쓰는 습작시(習作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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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중에도 인쇄소에는
쉬지 않고 기계가 움직였다.
고달픈 내 몸은 그러나
녹슨 기계처럼 삐걱거렸고
문 밖에선 밤새도록
거센 바람이 불어왔다.
이윽고 내 몸은 기어이
고장 난 기계가 되어
바람 소리만으로도
심한 떨림이 감지됐다.
작업장 한 구석에는
조그만 난로가 있었지만
난로를 쬐면 오히려
추위가 더 느껴졌다.
그래서 우린 자린고비처럼
난로의 붉은 불꽃을
가만히 쳐다보는 것만으로
때마침 몰아친 한파(寒波)를
어떻게든 견뎌내려 했다.
계속됐던 단순한 작업과
밀려왔던 지독한 공허함.
우릴 위로해 주던 건
작업장에 조용히 흐르던
따뜻한 음악 소리뿐.
어느 날엔
FM 라디오 전파(電波)를 통해
밤새도록 음악 방송을 들었다.
다음 날 이른 새벽 라디오에서는
"4시 55분입니다."이라는
아나운서의 멘트와 함께
애국가가 흘러나왔다.
그런데, 아직은
세상 어둡고 캄캄한
한겨울의 이른 새벽.
하지만 밖에선 벌써부터
부산히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밤샘 작업을 마친 우리는
사우나에 가려했지만,
마침 그날은 水曜日.
그래서 할 수 없이 들어간 곳은
뼈다귀 해장국집.
새벽의 식당 문을 열자마자
안경에는 김이 한가득 서렸고
그렇게 우리는 식당의 온기를 맞으며
얼었던 손을 녹였다.
순서대로 뜨거운 국밥을 받자마자
너도 나도 정신없이 후후 불며
그렇게 우리는 밥을 한 숟갈씩 들고
얼었던 속도 녹였다.
하지만 내 마음은,
옛 소비에트 연방의
키릴 문자로 쓰여있던,
주변 상점의 간판들처럼
도무지 알 수가 없었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수주받은 물량은 어떻게든 채워서
"납품"이라는 것을 해야 했다.
그래서 "납기"(納期)라는,
당시로선 매우 생소했던
그 단어를 접한 뒤부턴
일상이 되었던 밤샘 작업.
한편, IMF 구제금융(救濟金融)이
휩쓸고 간 그 시대의 흔적은,
세기말(世紀末)의 그곳에도
여전히 진행 중이었고
차가운 현실에 부딪힌 우리는
고된 작업의 힘겨움과 괴로움을
하루 만에 벌써 다 알아버렸지.
그래서 매일 헛웃음을 지으며
하루하루를 억지로 버텼지만,
예정된 일정의 중반 이후엔 어쩐지
시간이 제법 잘도 흘러갔다.
그런데, 세기말이라 그랬는지.
6주라는 비교적 짧은 기간에도
시간이 지날수록
크나큰 변화의 바람이 불었고.
'빛' 광(光) 자(字)에
'빛날' 희(熙) 자(字)를 쓰는,
빛이 빛나는 밝고 밝은 그 동네에서
지난 몇 년간 우후죽순(雨後竹筍)으로
늘어났던 러시아어(露語) 간판들이
러시아의 세기말 모라토리엄 선언과 함께
저 어두운 뒷골목으로 금세 사라져 갔다.
대신 이른 아침부터
중앙아시아 유목민(遊牧民)들의
진한 양고기 냄새가
거리를 뒤덮고 있었다.
꼬치구이의 자욱한 연기와 함께.
그렇게 빛(光)이 빛나는(熙)
밝디 밝은 동네의 어두웠던 뒷골목엔,
우울한 세기말이라 더 그랬는지,
동네의 주민들의 생김새가
하루가 다르게 변해갔고
동네의 언어 또한
어느샌가 바뀌어 있었다.
대한민국 국적을 갖고 있던 우리는
그러나 그 동네에선
하층민(下層民)인 노동자일 뿐이었고,
실크 로드를 타고 온
이역만리(異域萬里)의 이방인(異邦人)들이
그 동네에선 역설적(逆說的)으로
텃세를 부리는 터줏대감이 되었다.
떠돌이 유목민들이 정착하여
주인이 되어선
발 빠르게 이른 아침을 여는 동네.
우리의 낮과 밤이 바뀌어 있듯,
정주(定住)와 유목(遊牧)이
거짓말처럼 교차했던 그 공간.
며칠의 연속된 작업 후
녹슨 기계처럼 고장 난 몸을
겨우 일으켜
어둠 컴컴해진 저녁시간이 되어서야
기계를 돌리러 다시
작업장을 찾은 그날은,
마침 사우나에 갈 수 있던, "불"의 火曜日.
찬 바람이 코끝을 얼게 만드는
작업장 한 구석에서
다시 맞았던 "불"의 날 새벽시간,
그리고 또 그렇게 반복되던 하루.
하지만 그 거친 노동의 의미를 알기엔
그리고 정주와 유목의 흐름을 알기엔
대학 2학년을 앞둔,
이십 대 초반의 나는 아직 너무 어렸다.
그저 고통스럽기만 했던 그 시절,
그렇게 세기말의 겨울이 지나갔고
그렇게 음력 구십팔(九十八) 년(年)이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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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1월 초부터
1999년 2월 15일 음력설 전날까지
인쇄소 작업장 한 공간에서
Y2K 인쇄물과 스티커를 포장하던
만 스물한 살의 나.
그리고 그때 밤을 새운 뒤
서툰 문장력으로 작업했던,
"광희동"(光熙洞) 연작시(連作詩)
물론, 지금은 찾을 수 없는
노트에만 적힌, 과거의 時가 되었지만,
추운 겨울, 그때의 그 느낌을 담아
몇 줄만이라도 다시 살려 써본
아직 진행형(進行形)인,
2026년의 "광희동" 연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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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1월에서 2월 중순까지,
지금은 없어진 광희동 건영 인쇄소 옆 건물에서
책자와 인쇄물을 정리하고 포장하는
말하자면 "노가다" 아르바이트를 했었다.
그땐 왜 그렇게 춥고 힘들었는지...
그동안 대학 새내기로 안락한 생활을 하며
고등학생 과외 아르바이트로 쉽게 돈을 벌다가
그러한 단순 노동을 해보니
세상을 살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당시 동네마다 있던 대중목욕탕이나 사우나가
水曜日엔 문을 닫는다는 것도
그때 처음 알았고,
인쇄소의 기계가 밤새도록 돌아간다는 것도
그때 처음 알았다.
물론 지금은 사우나도 매일 영업하는 곳이 있고,
인쇄소의 기계도 야간엔 멈추는 곳이 대부분이지만.
한편, 작업 중간에 "나 과외 좀 다녀올게."라고
말했던 게 너무나도 미안하게 느껴지던 그 시절.
그땐 하루 8시간씩 이틀간 16시간의 노가다보다
한 달 16시간의 고교생 상대 과외 아르바이트가
훨씬 더 많은 돈을 벌던 시절이었다.
물론 최저임금(最低賃金)이 매우 가파르게 상승한
지금 시대에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겠지만.
그때 그 작업장에선
같이 일하던 친구 놈은 노동요(勞動謠)로,
당시에 우리가 한창 연주하고 부르던
민중가요(民衆歌謠)를 틀어댔다.
"휘몰아치는 거센 바람에도"
"부딪혀오는 거센 억압에도"
이렇게 시작하는 동지, 동지(同志), 동지가(同志哥)!
그리고 동대문에서 그리 멀지 않은 그곳의 노래,
끈질긴 우리의 삶을 위하여 불러대던,
천지인(天地人)의 "청계천 8가".
하지만, 정작 고된 노동의 효율을 높여 주던 건
다소 험악한(?) 가사가 나오던 민중가요가 아니라
가벼운 가사의 댄스음악을 위시(爲始)한,
소위 말하는 "인기가요"였다.
그래서 언젠가부터는 Playlist를 변경하여
어디에서 구입했는지 모르는 가요 테이프를 넣거나,
아니면 아예 심야(深夜)의 라디오 방송을 들었다.
그때 작업하며 노동요로 듣던 게 처음엔
핑클의 "루비"(淚悲) : (눈물 루, 슬플 비)
오락실(5Rock室)의 "후"(後),
박지윤의 "Steal away",
그리고 한스밴드의 "선생님 사랑해요"
류(類)의 여성 보컬 위주 가요였고,
나중엔 코요태(高耀太)의 "순정"(純情),
샵(The S#arp)의 "Lying" 같은
여전히 여성 보컬이지만 분위기가 좀 세진,
나이트에서나 나올 법한 댄스음악으로 바뀌었다.
그러다 힘에 부치기 시작했던 작업 막판 무렵
가사가 너무나도 구슬픈,
god의 초특급 데뷔곡인 "어머님께"가
라디오에서 매 시간 계속 흘러나오기도 했다.
당시 나와 내 친구는 "Rock Spirit"을 부르짖던
Rock 밴드의 핵심 멤버이면서
민중가요를 주로 부르던 노래패의
객원(客員) 밴드 단원이기도 했는데,
막상 힘든 일을 할 땐
민중가요는 멀리 내던지고,
한창 유행하는 인기가요와
한없이 가벼운 댄스음악을 틀었다.
삶은 그렇게 모순(矛盾) 덩어리였다.
우리가 표방(標榜)했던 음악보다
우리가 혐오(嫌惡) 해야 했던
(혐오"했던" 게 아니라 혐오"해야 했던")
싸구려 음악이
일반 대중들에는 더 먹혀들었고
결국엔 우리에게도 더 먹혀들었다.
그리고 우리가 늘 주입받던,
NL인지 PD인지 하는 그런 용어는
삶의 현장에선 그다지 쓸모가 없었다.
게다가 나는 그 속에서
적당히 저속하고 적당히 속물근성을 갖춘,
소위 "쁘띠 부르주아" 같은 존재였는데,
(과외 아르바이트를 무려 2~3개를 했으니)
그러다 보니 겉으론 노동자가 아닌 자였지만
노동의 현장에 잠시 들어갔던
말하자면 위선자(僞善者)였다.
광희동(光熙洞)도 마찬가지였다.
문자에선 빛이 났지만,
막상 동네에 가보면 어둠만 보이던 곳.
동대문의 화려한 네온사인을 뒤로하고
한 귀퉁이에 숨어서
빛을 발하는 뒷동네인 광희동(光熙洞)은,
오히려 빛보다는 어둠이 더 어울리던 그런 곳이었다.
모순(矛盾) 덩어리의 삶을 살고 있던 어린 내게
광희동(光熙洞)은, 빛과 어둠의 역설(逆說)을
있는 그대로 알려주던, 그런 곳이었다.
나는 그때의 경험으로 세기말의 봄 학기 개강 후
학회실 날적이(그 시절 우리의 공동일기) 귀퉁이에
"광희동(光熙洞)"이라는 연작시(連作詩)를 썼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금은 그 기록이 남아있지 않지만,
그 시절을 떠올리면 늘 내 기억 속에 머물던
광희동(光熙洞)을 오랜만에 찾은 오늘,
그때의 옛 기억을 되살려 몇 자 끄적여본다.
(참고) 광희동 중앙아시아 거리의 사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