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스위트 김은미 대표
1980년대 호주 유학 떠나
1997년 공유오피스 창업
인도네시아·중국·싱가폴 진출
“1997년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 첫 사무실을 열었어요. 집을 담보로 잡고 아버지 돈을 사업자금의 20% 정도 빌려 목돈을 만들었죠. 사업자등록을 하고 나니 산 넘어 산이었어요. 결혼한 지 2년 넘도록 소식이 없던 아이를 그 해에 임신했습니다. 곧이어 IMF 위기가 닥쳤죠. 폭도들이 화교(華僑) 상가가 밀집한 지역에 약탈·방화·강간 등을 일삼았어요. 그 와중에 만삭의 몸으로 사업하겠다고 이리저리 뛰어다녔으니 참 무모하죠.”
김은미 CEO스위트 대표는 인도네시아에서 꿈을 이룬 여성 사업가다. 20여년 전 설립한 CEO스위트는 공유 오피스 서비스 회사다. 현재 CEO스위트는 한국·중국·싱가폴·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 등 아시아 8개국·11개 도시에 21개 지점을 두고 있다. 올해는 홍콩에도 진출할 계획이다. 2017년 연 매출 420억원을 기록했다. 2020년 목표 매출은 650억원이다.
◇사무실 임대뿐만 아니라 각종 서비스 함께 제공
CEO스위트는 페이스북·우버·마이크로소프트·베인앤컴퍼니 등 글로벌 기업이 주 고객이다. 이들이 다른 공유 오피스보다 약 2배 비싼 임대료를 내면서 CEO스위트를 찾는 이유가 있다. 사무공간을 빌려주는 것뿐만 아니라 회사 운영에 필요한 전문비서·법률·회계·통역 등 각종 프리미엄 서비스를 함께 제공한다.
“위기 속 기회를 찾은 거죠. 폭동 사태로 인도네시아 현지 상황이 불안해지자 외국 기업들이 아예 철수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기업 입장에서 지점을 접는 것도 큰 손실이죠. 그때 제가 할 수 있는 사업 아이템이 보였습니다. 외국 본사에서 지시를 내려주면 우리가 직접 회계 업무부터 법률, 직원 채용 등 모든 운영 관리를 해주겠다고 제안했어요.”
경제 불황으로 하루에도 수백개의 기업이 도산하던 시기. 1달러에 2500루피였던 환율이 1만5000루피까지 치솟았다. 김 대표는 이렇게 불안정한 때에 기업에게 가장 필요한 서비스가 무엇일지 고민했다. 인도네시아에 입주한 해외 기업은 본사에서 파견한 관리직이 실질적인 회사 운영을 담당했다. 그러나 파견 직원은 그 나라의 법률이나 문화, 채용 과정 등을 자세히 몰랐다. 김 대표는 이 지점에서 기업의 손실과 리스크가 발생한다고 여겼다.
그는 고객사에 화상회의실 등 최신 통신 설비를 갖춘 사무실과 함께 전문 비서, 법률, 행정, 회계 등을 제공하는 ‘원스톱 사무실서비스’를 제안했다. 그 결과 야후·엑슨모빌·브리티시 텔레콤 등 대형 고객과 계약을 맺는데 성공했다. CEO스위트는 최악의 경제 위기를 겪던 인도네시아에서 유일하게 수익을 내는 기업으로 자리 잡았다. 이후 말레이시아·싱가폴·중국 등에 진출해 세를 넓혔다.
“저희와 첫 계약을 맺은 노르웨이 S전력 측에서 이렇게 말했던 게 기억이 나요. ‘당신을 믿고 계약하지만 정말 끝까지 맡겨도 되냐’고 물었죠. 전 만약 이 계약을 책임지지 못한다면 100만달러(약 11억8530만원)의 위약금을 물겠다 약속했습니다. 이후 그 회사는 10년 동안 CEO스위트와 계약을 맺었습니다. 모두가 불가능하다 할 때 가장 과감한 결정을 내려요. 그리고 반드시 약속을 지킵니다. 그걸 동력 삼아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생각해요.”
◇첫 직장은 씨티은행···"입사 동기 중 실적 꼴찌였다"
김 대표는 “아무도 나를 고용하는 곳이 없어 스스로 회사를 차렸다”고 한다. 하지만 아무도 고용하는 곳이 없었다고 말하기엔 거쳐온 직장이 많다. 김 대표는 1985년 연세대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한 뒤 씨티은행에 취업했다. 학보사에 인터뷰 기사가 실릴 정도였다. 당시 씨티은행 은행원의 연봉은 1000만원. 높은 연봉과 외국계 기업의 선진적인 직원 처우, 유연한 기업 문화 등이 장점이었다. 그러나 김 대표는 1년을 채우지 못하고 씨티은행을 퇴사했다.
“입사 동기 6명이 있었습니다. 제 업무능력은 최악이었어요. 컴퓨터에 데이터를 입력하고 복사하는 일이 주요업무였는데 원체 꼼꼼하지 못한 성격이라 실수 연발이었죠. 1불의 오차도 용납하지 않는 곳인데 오타를 입력해 엉뚱한 금액을 보내거나 아예 데이터를 다 날리기도 했어요. 직속 상사가 저를 혼내다 생각해낸 방법이 소개팅이에요. 남자를 소개해줘서 결혼하면 제 발로 나갈 거라 여겼던 거죠. 해외에서 MBA 과정을 밟은 남성들과 원 없이 소개팅한 기억이 나요.”
김은미 대표는 신랑감을 찾지 못한 상태로 직장을 그만뒀다. 이후 대한적십자사 국제부에 입사했지만 조직문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퇴사했다. 이어 영국계 바잉오피스 회사 딕슨즈로 이직했다. 그러나 더 큰 도전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에 그만두고 호주 유학길에 올랐다. 집안 형편이 어려웠던 데다 보수적인 아버지가 반대할 것이 분명했다. 가족의 지원은 기대조차 할 수 없었다. 씨티은행과 대학생 시절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모았던 돈 1000만원 정도가 밑천이었다. 학비와 생활비가 비교적 저렴한 호주로 야반도주하듯 몰래 떠났다. 수중에는 뉴사우스웨일스(New South Wales) 대학원의 마케팅 과정 입학 허가증과 한 학기 등록금, 몇 달 치 기숙사비가 전부였다.
“요즘 청년들이 하고 있는 고민과 똑같았어요. 잘하는 것, 하고 싶은 것이 불분명했어요. 이직과 퇴사를 반복하다 보니 받아줄만한 곳도 없었죠. 벌여보고 싶은 일은 많았지만 1980년대엔 ‘여자는 안된다’는 고정관념이 만연했어요. 답답했습니다. 한국 밖으로 나가야 길이 보일 것 같았죠. 1986년 호주 야간대학원에 입학해 낮엔 통역 아르바이트를 하고 밤엔 수업을 들었어요. 대학원 졸업 후 한국 기업에 100통 정도 이력서를 보냈는데 단 한 군데도 붙지 못했어요. 나이가 많아서였을 거예요. ‘차라리 잘 됐다. 이대로 호주에 있어야겠다’ 싶었죠.”
◇호주 중소기업 서브코프 입사
그녀가 졸업 후 갈 수 있었던 회사는 두 곳이었다. 홍콩 재벌이 이끈다는 세계적인 통신사 허치슨텔레콤(Hutchison)과 호주 공유 오피스 기업 서브코프(Servcorp). 세계적으로 통신사업을 하고 있는 다국적 기업 허치슨텔레콤을 들어본 이라면 누구나 이곳을 택했을 것이다. 그러나 김은미 대표는 1989년 호주 공유 오피스 회사 서브코프에 입사했다. 중소기업이지만 자신이 주체적으로 프로젝트를 맡아 성과를 발휘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예상은 적중했다. 회사에서 능력을 인정받은 그는 입사 6개월만에 태국 지사장으로 발령이 났다.
“처음 회사에 들어가서는 따돌림을 겪었습니다. 너무 적극적으로 일해서 미운털이 박혔나봐요. 능력을 인정받아야겠다는 생각에 시킨 것도 아닌데 잠도 안 자고 주말 근무를 했습니다. 호주에서 그렇게 일했던 사람은 저밖에 없었어요. 사장을 제외한 나머지 직원들은 저를 독종 취급했습니다. 입사한지 6개월 지나 따돌림에 지쳐가던 때였어요. 회사가 아시아에 처음 진출한 나라가 태국이었는데 몇 년째 적자라 그 지점을 철수시킨다는 겁니다. 제가 가겠다 손을 들었죠. 한국이라면 상상이나 했겠어요? 들어온 지 1년도 안된 신입이 지사장으로 보내달란 말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사장이 태국에 보내줬어요. 그런 자율성 덕분에 제가 8년간 서브코프에 몸담고 일했던 것 같아요.”
결국 입사 6개월만에 태국 지사장으로 발령 났다. 김 대표는 보란 듯 1년만에 태국 지사 매출을 전년 대비 300% 끌어올렸다. 전 세계 지점 중 최고 수익을 기록했다. 능력을 인정받아 그 해 최고매니저상을 수상했다. 태국은 난생처음이었지만 공유 오피스 사업은 김 대표가 가장 자신 있는 분야였다. “사무실을 한번 둘러보면 감이 딱 와요. 잘 될지, 실패할지. 여기 입주할 기업들은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서비스가 필요할지 보여요. 호주 지사장이 태국 지점 운영에 실패한 이유는 서양인은 이해하지 못하는 아시아만의 정(情) 문화 때문이에요. 전 영업할 때 식사 한 끼 하더라도 저희를 기억할만한 작은 캥거루 배지, 코알라 인형 등을 준비해 갔어요. 그런 작은 부분에서 달랐다고 생각해요.”
폐업 수순이었던 서브코프 방콕점은 다음 해 2호점을 오픈했다. 김 대표는 그 후 8년간 서브코프에 근무했다. 아시아 지점 10개 중 6개 센터를 직접 운영했다. 1996년 서브코프 자카르타 지점을 세우는데 성공, 자카르타 지사장과 동남아시아 총괄이사장을 겸했다. 30대 중반의 나이에 호주 공유 오피스 기업의 임원으로 억대 연봉을 받았다. 회사는 호주 거래소에 상장을 앞두고 있었다. 일본 진출은 그녀가 가장 공들였던 프로젝트였다. 시장조사부터 입지 선정, 회사 설립, 지점 공사, 직원 채용 등 모든 과정을 진두지휘했다. 그러나 막상 일본 지사를 오픈하자 본사는 그녀가 아닌 호주인을 지사장 자리에 앉혔다.
◇8년 근무했던 회사의 배신···"나를 고용하기 위해 창업"
“회사에 제 존재감이 너무 커져서 그랬겠죠. 지금 생각하면 이해가 가기도 하지만 당시 배신감에 잠을 자지 못했어요. 청춘을 전부 바친 곳이었거든요. 회사는 제가 퇴사한다고 했을 때 붙잡지도 않았습니다. 일을 그만두고 당장 돈이 필요했던 것은 아니었어요. 결혼도 했고 모아둔 재산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대로 멈춰있을 순 없었어요. 아침에 눈을 떴을 때 갈 곳이 없다는 사실에 힘이 빠졌어요. 동남아시아 주요 기업에 이력서를 돌렸지만 제가 가진 경력과 연봉을 맞춰줄 만한 곳이 없었어요. 창업을 결심한 이유는 저밖에 저를 고용할 사람이 없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CEO스위트는 올해로 창업한지 22주년을 맞았다. 한국 지점은 서울 광화문 교보빌딩과 강남 그랜드인터컨티넨탈 파르나스 타워에 있다. CEO스위트는 올해 안에 국내 3호점을 열 계획이다. 김 대표는 “한국 시장이 까다롭다”고 한다. 동남아시아에서 일군 사업이라는 이유로 의심부터 하는 데다 여성 사업가에 대한 편견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위워크·패스트파이브 등 경쟁기업이 이미 자리를 잡았다. 수많은 국내외 기업들이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다. 이른바 레드오션인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CEO스위트는 몸집을 불리기보단 내실을 강화할 방침이다.
“CEO스위트는 현재 전 세계 지점에 250명의 직원을 둔 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제가 찾는 인재상은 딱 두 가지예요. 글로벌 감각과 고난을 이겨내는 태도를 갖췄는지 살핍니다. 어려움과 마주했을 때 주어진 사지선다의 정답을 잘 찍어내는 모범생이 아닌 새로운 대답을 만들어내는 창의적 인재를 찾습니다. 급변하는 시대에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남과 다른 아이디어예요. 제 커리어는 한국의 좋은 직장을 나와 호주 중소기업에 들어가면서 시작됐어요. 또 그곳에 안주하지 않고 동남아시아 시장을 개척했죠. IMF 사태에 창업했을 땐 모두 미친 짓이라고 했어요. 답을 찾을 때까지 두드리다 보면 결국 길이 열린다는 말을 대한민국 청년들에게 꼭 해주고 싶습니다.”
글 jobsN 김지아
jobarajob@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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