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당할 수 있겠냐고 물었습니다.’ 검은 목폴라를 입은 한 유튜버가 카메라를 노려보면서 대사를 한다. 한 문장만 들어도 감이 온다. 온 국민이 아는 드라마 SKY캐슬 등장인물 성대모사다.
◇성우 출신 유튜버 ‘쓰복만’
‘스카이캐슬 나름 고퀄 성대모사하기’라는 제목의 관련 영상 4편은 총 조회수 1137만(2020년 5월 기준)을 기록했다. 1년 전 본격적으로 올리기 시작한 유튜브 영상은 다 합쳐도 50개가 안되는데 구독자가 11만명이다. 천연덕스러운 표정과 말투, 캐릭터와 엇비슷한 의상까지. 처음엔 재밌어서 웃음이 나오다 ‘빙의’ 수준의 모사 실력에 감탄이 나온다. 모든 영상을 직접 기획하고 연출한 유튜버 ‘쓰복만’의 정체는 EBS 성우 25기 김보민(30)씨. 김보민 성우를 만나 직업의 전문성과 유튜브 콘텐츠를 연결하는 방법에 대해 물었다.
“안녕하세요. 성우 김보민이라고 합니다. 이젠 유튜버 ‘쓰복만’이 더 익숙하시죠. 어쩌다 전문 성우가 드라마 캐릭터를 따라 하는 영상을 올렸냐구요? 어릴 때부터 선생님 말투 따라 하고 친구들 행동 흉내 내면 반응이 좋더라구요. 자연스럽게 목소리에 여러 감정을 담아 표현해내는 성우를 꿈꿨죠.”
‘너 이러다 정말 텔레비전에 나올 것만 같아.’ 신들린 듯 연예인부터 주변 지인까지 복사하듯 따라 해내는 김보민 성우를 보면서 친구들은 이렇게 말했다. 자타 공인 재능과 끼가 끓어넘치는 그였다. 현실적인 문제 앞에서 머뭇거렸던 때도 있었다. 관광영어통역학을 전공한 뒤 스물한살에 호텔리어 인턴으로 입사했지만 성우의 꿈에 미련이 남았다. 인턴 기간을 마친 뒤 본격적으로 성우 시험을 준비했다. 그 후 6년이라는 길고 긴 성우 지망생 시절을 보냈다.
◇전화상담안내원·내레이터 아르바이트로 버틴 6년
“성우를 준비하던 6년의 시간 동안 목소리 관련 아르바이트를 안 해본 게 없어요. 전화 상담 안내원, 행사 MC, 내레이터 아르바이트 등이죠. 독서 낭독 봉사도 했어요. 그중 전화 상담 안내원 일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무작정 화를 내고 욕설을 내뱉는 상담자들의 분노를 다독이는 일이었죠. 어느 날 직장 동료가 ‘보민아 왜 이렇게 모니터 앞에 고개를 숙이고 있어’라고 물어보더라구요. 고객에게 죄송하다 사과하는 게 주 업무라 몸이 저절로 움직인거죠. 힘들었지만 제 목소리로 고객분들의 노여움이 누그러질 수 있다면 그 역시 성우의 역할을 한 거라 믿었어요.”
스물여덟의 나이에 500대1의 경쟁률을 뚫고 EBS 25기 공채 성우 시험에 합격했다. 면접장에서도 긴장하지 않고 자신의 주특기를 발휘했다. 쇼호스트로 변신해 자기소개를 한 뒤 자연스럽게 도라에몽·할아버지 성대모사로 넘어갔다. 면접관들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고 한다.
“합격 비결이 있다면 체력과 에너지를 보여준 것이라 생각해요. 체력 하나만큼은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거든요. 지금도 성우를 꿈꾸는 후배들에게 꼭 해주는 말이 있는데, 운동을 하라는 거예요. 목소리는 목에서만 나오지 않아요. 온몸에서 뿜어져 나옵니다. 자유자재로 소리를 내려면 몸의 근육이 자유로워야 해요. 저는 성우 지망생 시절 하루 2시간씩 매일 스트레칭과 조깅을 했습니다. 동네 인근 공원에서 뛰면서 ‘가!갸!거!겨!’ 발성 연습을 했어요. 또 쉴 땐 스트레칭을 하면서 옆에 계신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나누는 담소를 귀담아 들었구요. 아이들이 얘기를 할 땐 표정을 관찰하면서 ‘저런 감정으로 말하는구나’ 이해하고자 애썼습니다. 이런 습관이 성우의 길로 이끌었다고 생각해요.”
◇2년 전속계약 후 프리랜서로···”목소리 콘텐츠는 무한해”
한국성우협회 소속 성우는 약 700명. 바늘구멍 같은 성우 공채 시험에 합격한다 해도, 안정적인 삶을 보장받지는 못한다. 시험에 합격하고 나면 방송국과 2~3년간 전속계약을 한다. 전속계약 기간엔 직장인처럼 출퇴근하면서 일한다. 계약이 끝난 다음엔 프리랜서 신분이다. 직접 존재감을 알리면서 일감을 받아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김보민 성우 역시 기라성 같은 선배들 틈바구니에서 어떻게해야 신입 성우로 살아남을 수 있을지 걱정을 많이 했다고 한다. 라디오·예능방송 등 다양한 활동을 시도하던 중 유튜브에 도전했다. 사람들에게 성우 김보민을 조금이라도 더 알리기 위한 방법 중 하나였다.
“불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죠. 갈수록 성우의 일자리가 줄고 있다고 해요. 또 프리랜서 성우분 중 생계를 위해 다른 일을 파트타임으로 하는 분도 계시고요. 하지만 앞으로도 성우만이 할 수 있는 영역이 분명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배우나 개그맨이 대체하지 못하는 작업이요. 성우들도 유튜브나 개인 방송처럼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는 활동을 하다 보면 기회가 더 많이 생길 거라 생각합니다. 다재다능한 끼와 재능을 갖고 계신 성우분들이 정말 많으시거든요.”
“전 우연히 친구가 너무 웃기다면서 찍어준 영상으로 유튜브를 시작했습니다. 예상외로 큰 관심을 받았죠. 목소리로 만들어낼 수 있는 콘텐츠는 무한합니다. 저 뿐만 아니라 유튜버 ‘임한올’님이나 ‘릴리세은’님도 전문 성우는 아니지만 자신의 장점인 목소리로 유튜브에서 활약하고 계시죠. 성우가 되고 싶은 분들께 드릴 수 있는 조언은, 기술을 익히기보단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특기를 갖고 있는지 생각해보라는 거예요. 성우 시험 합격 여부를 떠나 ‘목소리 크리에이터’로서 멋진 걸 표현할 수 있게 해줄 테니 말이죠.”
◇성우의 평균 월 소득 372만원, 직업만족도는 TOP 5
한국고용정보원이 4월 발표한 ‘한국의 직업정보 조사’를 보면 우리나라 성우의 평균 연봉은 4475만원이다. 성우들은 대다수 개인사업자로 활동하고 있다. 높은 수입을 올리는 성우와 그렇지 않은 성우의 임금 격차는 크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행복도가 높은 직업 중 하나다. 같은 조사에서 성우의 직업 만족도는 5위에 올랐다.
“정말 좋아하는 일을 평생 할 수 있으니 만족도가 높지 않을까요? 앞으로도 성우로 일하면서 유튜브 활동을 하고 싶어요 따라 하고 싶은 캐릭터가 생기면 영상을 찍을 생각입니다. 유튜브는 어떻게 찍냐구요? 일단 대사를 적어놓죠. 5벌 정도의 캐릭터 옷들을 준비합니다. 헤어스타일을 다 다르게 연출해봐요. 그 다음 영상을 찍습니다. 고생스럽지 않냐고 질문하시는데, 빈말이나 가식이 아니라 진심으로 행복해요. 꿈꾸던 일을 하면서 사람들에게 밝은 에너지를 나눠드리고 싶습니다. 앞으로도 성우 김보민의 전문성을 살려 유튜브 활동을 해나갈 테니, 재밌게 지켜봐 주세요.”
글 김지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