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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아 Oct 04. 2020

YES맨 말고 NO맨이 되라

나심탈레브의 안티프래질

이번 연휴는 나심 탈레브와 함께 했다.

설탕과 우유를 먹는 행위가 건강에 미치는 영향에까지 언급하는 만큼, 

정말 방대한 사회적 현상을 진찰한 책이다.


다만 나는 인상깊었던 세가지 파트만 추려 정리를 해보려고 한다.


1. 나심은 왜 ‘블랙스완’, ‘트라이팟’, ‘안티프래질’과 같은 단어를 만들었을까?


책은 기본적으로 어렵다. 의도적인건진 모르겠는데 나심은 어려운 얘길 한다. 머리 좋고,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사람들은 책을 쓰는 사회적인 활동을 할 때 오류가 난다. 일반 대중 눈높이에 맞추려고 언어를 창작해 설명하는데 만든 용어가 이해를 더 어렵게 한다. 블랙스완, 안티프래질, 트라이애드 같은 단어들이 더 알쏭달쏭한 생각만 들게 한다.


‘우리가 알고 있고 그에 따라 행동하지만, 인간의 언어 혹은 인간이 만들어낸 제한된 개념으로 직접 표현할 수 없는 대상이 상당히 많다.’ -6장 비아네가티바


나심 말대로, 세상에는 아직 언어로 구체화되지 않은 현상들이 있다. 예를 들면 파랗다는 단어다. 오랳동안 인류의 언어에는 파란색을 지칭하는 ‘블루(파랗다)’라는 단어가 없었다. 파랗다는 개념은 분명 존재하는 대상이었다. 블루가 등장하기 전까지 물색, 하늘색, 호수색 등 다양한 언어로 나타났다. 현대인이 표현하는 언어 중에는 아직 ‘블루’처럼 지정하지 않은 미지의 단어가 분명 존재한다. 그래서 나심은 제한된 개념으로 직접 표현할 수 없는 현상을 창작해낸 것이다.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현상이 또 뭐가 있을지 떠올려봤다. 카페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는데, 내가 왜 방이 아닌 카페에 와 있을까 궁금해졌다. 카페에 가고 싶은 욕구는 다양한다. 커피를 마시고 싶어서. 햇빛이 잘 드는 창가에 앉고 싶어서 같은 단순한 동기뿐만이 아니다.


굳이 다른 사람이 존재하는 공간에 앉아 대화 내용을 공유하는 행위, 나의 작업 과정을 보여주려는 의도가 분명 숨어져 있다. 가방을 싸면서도 누군가 나를 보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도 안다. 아무도 나한테 관심 없다는 걸. 하지만 아무도 지켜보고 있지 않지만 누구나 지켜볼 수 있는 공간에 있는건 분명했다. 나를 보여주려는 행위가 우선순위는 아니지만, 어쨌거나 타인에게 나의 존재를 노출하려는 욕구는 뭐라 지칭할 수 있을까? 분명 존재하지만 아직 창조되지 않은 언어의 영역에 있다. 


2. NO맨이 되라


'단순한 것이 정교하다. 지식은 추가가 아니라 제거에 의해 더욱 발전한다. 타협은 묵인이다.'


나심은 중간이 없다. 그의 의견에 반하면 곧장 공격으로 이어진다. 틀린 것에 대해 침묵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래서인지 심심치 않게 암살공격을 받는다는 얘기를 늘어놓는걸 보면, 자기 x대로 의사표현하면서 살아가는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한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범죄조직에 연루된 사람도 아닌데 그 생각이 틀렸다고 말하는 것 만으로 공격에 시달린다니 말이다. 아닌건 아니라고 말하는 그 강직성에 대해서는 할말이 없다. 


나는 상당 기간 아닌것도 그냥 그런가보다 수용하고 마는 평범한 수준의 인간으로 살아가곤 했다. 내가 관심있는 것은 논쟁에서의 승리보다 결과에서의 승리였다. 가난해질까 무서웠기 때문이다. 재화는 결과의 승리에서 나온다. 나심 역시 그걸 알고 있었다. 세상은 진실을 말하는 사람보다 누가 많은 사람들에게 진실이라고 믿게 만들어 특정 서비스/제품/사상 등을 많이 팔았는가가 중요하다. 도덕을 따지고 들면 끝이 없다. 하지만 결과의 승리를 예민하게 느끼는 부류들이 있다. 철학가나 사상가들이다. 대다수 사람들은 킴카다시안 가족들이 10년 전 얼마나 경박한 다큐멘터리를 찍어서 지금의 부와 유명세를 거머쥐었는지에 대해서 관심 없다. 결과의 승리가 논쟁의 승리를 이길 수 없다. ‘돈은 DOG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쓰라’는 말이 그렇다. 


나심이 이같은 의도로 ‘논쟁의 승리’와 ‘결과의 승리’를 구분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내가 이해한바로는 그랬다. 결과의 승리를 위해서 사람들이 좋아하는 설탕과 조미료를 넣고, 자신의 신체를 일부러 노출하는 장사꾼들이 있다. 그 중 누가 최종적으로 결과의 승리를 거머쥘까? 난 그저 사람들이 조금 더 단짠을 줄여나가길, 인스타그램만 켜면 나오는 가슴 영상이 좀 줄어들길 바랄 뿐이다. 


어쨌든 논쟁의 승리건 결과의 승리건 승리로 가는 강력한 공식이 있다면 뺄셈과 거절밖이다. 삶의 행위를 간소화하고 정교하게 만들어야한다. 일의 시스템 역시 마찬가지다. 뭘 더 하려고 하기 보다는 더 집중해서 강력한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늘 다짐하는 부분이다. (안티프래질 리뷰같은건 쓰지 말고 말이다.)


3. 창백한 넥타이부대와 신뢰가능한 사람


‘대기업 편을 드는 우파 인사들은 애덤 스미스의 저작을 읽어보지도 않고는 그를 자본주의의 수호신으로 여기면서, 그의 사상을 이기적인 방식으로 선별해 인용한다. 하지만 정작 애덤 스미스 본인은 자본주의라는 말을 꺼낸 적이 없고, 그들이 주장하는 내용에 대해서도 대부분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나심은 책에서 믿을 수 있는 사람에 대해 언급했다. 타인의 거짓말을 구별하는 기준은 그 사람이 발언에 대해 책임을 지는가 안지는가에 달려있다. 오늘날 수많은 경제전문가들이 미래를 예측하면서 그 예측이 사실과 틀린 것으로 판명났을 때,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고 있다. 경제전문가, 학자들의 예측이 틀렸다면, 그저 운이 나빴다는 정도로 치부되곤 한다. 하지만 예측이 맞았을 때는? ‘운이 좋았다’ 정도가 아니다. 과대평가가 이어진다. 관심이 몰리고, '이 시대 진정한 예언가'라는 찬사가 이어지면서 정치권과 언론은 그의 다음 발언에 주목한다. 책임은 거의 지지 않는데도, 보상이 지나치다. 나심은 이런현상을 끊임없이 반복해대는 지식인층에 대해 ‘창백한 넥타이 부대’라고 했다. 가장 혐오해 마지 않는 부류다. 


그럼에도 ‘창백한 넥타이부대’에 대해 약간 항변을 하고 싶은 마음은 있다. 사회 구성원 중 지적 활동을 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고 사회현상을 바라보고 관찰하는 집단이 있다면, ‘창백한 넥타이부대’일 것이다. 이 사람들이 주말에 그냥 고기 구워먹고, 엉덩이 긁으면서 아프리카TV 방송을 본 건 아니다. 적어도 뉴스는 계속 모니터링했을 것이다. 정말 지루하고, 끔찍한 일이다. 이걸 꾸준히 하면서 미래 예측을 하는 한심한 행위를 했다는 의미는 개인의 소중한 시간을 희생시켰다는 뜻이므로. 어느정도 인정해줘야 할 부분이 있지 않나 생각한다.


세상이 창백한 넥타이부대 중심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엘리트층은 일상에서 상습적으로 지적 성실성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자신의 예측을 계속 시장에서 내놓으려 고심했다는 점에서, 그 공허한 예측을 대중에게 진실하다 믿게 만들도록 ‘판매’했고, 어느정도 성공했다는 점에서, 결국 결과의 성공이다. 그러니 이들의 생명력은 인류에게 해악이 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질기고, 안티프래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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