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보다 중요한 것
한때 처음부터 끝까지 돈 얘기만 하는 콘텐츠가 꽤나 인기를 끌던 시절이 있었다.
경제적 자유, 월급 노예 해방, 월 천만원 벌기 등의 구호가 널리 쓰였다.
처음엔 꽤나 신선했다.
시기적으로도 잘 맞아떨어졌다.
이런 구호들이 코로나 시기의 대중의 불안한 심리를 잘 파고들었다.
사이비 종교가 사람들에게 최면을 걸듯 효과가 있었다.
이런 콘텐츠를 만드는 유튜버와 인플루언서들은 최종적으로 책과 강의를 팔았다.
이들 태도엔 공통점이 있었다.
"흙수저&지방대 출신의 내가 돈을 좀 벌어보고 나니, 돈 버는 방법을 알게 됐다, 나는 나와 비슷한 출신의 흙수저이자 머리 나쁘고 금융지식 떨어지는 불쌍한 중생들을 구제할 수 있다, 구제해야만 하는 사명감을 갖고 있다."
그들의 영상을 보면 마치 신이 내린 사명감을 부여받은 것 같은 카리스마와 책임감이 느껴진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의 콘텐츠 수준과 영리한 마케팅 스킬이 질 떨어지지도 않았다.
대중들은 열광했다.
하지만 코로나는 끝났다. 사람들은 혼란스럽던 일상에서 벗어나 루틴을 되찾았다.
대부분 매일 아침에 일어나 출근하고, 저녁까지 일하는 직장생활을 한다.
그들의 머릿속엔 경제적 자유, 디지털 노마드라는 단어가 희미해져갔다.
경제적 자유를 그토록 주창하던 어떤 인플루언서의 과거 사업의 실체가 드러나면서 열기와 거품이 꺾이기도 했다. 그의 사업은 헤어진 연인을 재회하게 만들어주는 연애상담 사업이었다. 물론 모든 사업에는 불법이 아닌 한 가치의 경중이 없다. 그 사업으로 돈을 벌고 소비자의 만족감을 얻어낸다면 사업가는 인정받을 수 있다.
하지만 대중에게 매출을 뻥튀기한 것은 사기 기망 행위다. '성공한 사업가인 나는 이런 이야기를 해주고 싶어' 라며 출판/강연 사업을 한다면 어떤 과정을 거쳐서 성공했는지를 입증할 수 있어야 한다. 그 검증이 무너진다면 결국 그 다음의 모든 이야기도 무너질 수 밖에 없다. 양치기 소년이 왜 거짓말쟁이가 됐겠는가. 대중들은 한번 거짓말 한 사람을 다신 믿지 않는다.
"그래도 그들은 그렇게 해서라도 해서 돈을 벌지 않았는가?
유명 유튜버가 되고, 인플루언서가 되지 않았는가. 시그니엘 같은 곳에서 산다고 자랑하지 않았는가?"
라고 반문한다면 할 말이 없다. 미안하지만 희대의 사기꾼 전청조라는 사람도 시그니엘에 살았다.
사람들에게 사기를 쳐서라도 돈만 벌면 그만이라면 차라리 마약을 파는게 더 많은 이윤이 남고 오래 갈 수 있는 사업모델이다.
가장 중요한건 이들의 거짓말과 사기를 내포하고 있는 사업모델은
놀랍게도 10년 이상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점이다.
그리고 인생은 생각보다 길다.
몇 푼 돈을 땡기자고 자신의 얼굴을 세상에 팔고선
결국엔 사기꾼이라는 주홍글씨를 안고 살아가고 싶은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따지고보면 간단한 산수인데 단순히 눈앞의 이익을 쫓아서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만다.
세상엔 자신의 인생을 그렇게 낭비하고 싶지 않다는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더 많아서 그나마 돌아간다.
거지같이 부려먹고 쥐똥만한 월급을 주는 직장이라도 꾸역꾸역 다닌다.
사람들 미어터지는 만원 지하철에 몸을 실어서 한시간이고 두시간이고 출퇴근을 하는거다.
떳떳하게, 스스로 밥벌이를 한다는 거룩함이 있어서다.
별 볼일 없는 직업과 직장이라도 방구석에 틀어박힌 히키코모리보다 백배 천배는 나아서다.
자신을 성인까지 키워준 부모의 등골브레이커가 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아침에 눈을 뜰 희망이 있는거다.
직장에서 왕따 당하고 점심에 혼자 밥을 먹는대도 날 받아준 조직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내심 고마움을 느낄 때가 있다. 그게 바로 소속감이다.
세상은 혼자 사는게 아니다.
결코 혼자 살 수도 없다.
직장을 퇴사하고 프리랜서 작가가 된 이후로 더 절실히 느끼게 됐다.
뭔가 이루고 싶은게 있다면 나와 함께 일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찾아서 거룩한 협업을 차근차근 이뤄내야 한다.
그러려면 직장에 있을 때보다 훨씬 더 겸손해져야 하고, 더욱더 시간약속을 칼같이 지켜야 하며,
동료들의 의견을 더 열심히 물어야 하고, 그들의 의견을 작품에 녹여내야 하는데다가,
아무 보수 없이 수많은 기획안과 대본들을 작성해야 하며,
1년6개월을 녹여내 만들어낸 4개의 결과물을 처음부터 다시 뜯어고쳐달라는 요구사항이 들어왔을 때
군말 없이 이행해야 한다.
내 이름이 걸린 일이라서 그렇다.
아직도 작가가 혼자 하는 직업이라 생각한다면 정말 큰 착각이다.
내가 알기론 세상의 모든 직업이 그러할 것이라고 믿는다.
나보다 더 훌륭하시고, 더 깊은 철학을 갖고 계신 세이노의 글을 인용해보고자 한다.
언제나 이분의 글을 성경처럼 보고 또 보며 배운다.
사실상 넷상 스승은 이분밖에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삶의 우열은 돈으로 가려지는 것이 아니다>
기요사키는 진짜 아버지의 경제관을 설명하면서 가난한 아버지가 "삼촌 두 분이 20년 동안의 군 복무를 마치고 퇴직한 후에 평생 연금 혜택을 받은 것에 감명을 받았다"고 표현했다. 물론 기요사키는 가난한 아버지의 '연금 선망론'보다는 부자아빠의 '재정 자립론'을 더 옹호한다.
하지만 연금 생활이 나쁘다 할 수는 없다. 사람은 돈만 갖고 사는 것은 아니다. 느리게 사는 것도 나쁜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미국에서도 연금 범위 내에서 재미있게 생활하는 사람들이 많다. 한국은 여러가지로 불안정한 측면이 많아 과연 내가 연금을 제대로 받을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미국은 퇴직연금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다.
연금으로 만족할 만한 삶이 보장된다고 할 때 과연 그 수혜자가 불행하다고 할 수 있을까?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의 가장 나쁜 요소는 돈이 없는 사람들을 야단치는 듯한 분위기를 띄고 있다는 점이다. 게으름을 꾸짖는 것이 아니라 가난의 원인을 투자에 대한 무지로 몰면서 가난을 부끄럽게 여기게 하는 인상을 강하게 준다. 설령 기요사키식의 금융지식이 없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미련하거나 열등한 삶이라고 매도할 수는 없다. 이것은 나의 철학이다. 게다가 가난의 원인은 금융지식의 부재에 있는 것이기보다는 일을 통해 이 세상에서 더 큰 대가를 얻어 내는 방법을 모르는 무지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덧붙여 말하자면 사람이 생을 살아가는 형태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부자로 사는 삶만이 유일한 삶의 형태로 숭배되어서는 안 된다. 나처럼 부자로 살겠다고 작정을 하고 덤빈 삶도 인간의 삶이며 반대로 가난하지만 자연 속에서 절약하며 삶을 관조하며 사는 삶도 인간의 삶이고, 평생을 남을 위해 봉사하는 봉사자의 삶도 인간의 삶이며,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평생 하지만 가난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삶도 인간의 삶인 것이다.
즉 삶의 형태에 우열은 없으며 모든 것은 각자가 삶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 기요사키의 가난한 아버지는 "우리는 그냥 가르치는 것을 좋아할 뿐이야"라고 말한다. 가르치는 게 좋아 교단생활을 오래 한 '가난한 아버지'는 부자 아빠에 비해 결코 열등하지 않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그들' 인플루언서 집단의 문제는 대중들로 하여금 '가난을 혐오하도록 만들었다'는 점에 있다.
가난을 혐오하는 사회는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게 분명하다.
가난은 혐오대상이 아니다.
반드시 극복해야만 하는 어떤 대상도 아니다.
가난은 그저 가난일 뿐이다.
돈이 그저 돈인 것처럼.
물론 가난을 어떤 시각을 갖고 바라볼지는 본인의 선택이자 자유다.
어떤 객관적 상태나 현상에 대해 특정한 감정을 주입하고,
강요한다면 그것은 사실상 사이비에 가깝다는게 내 생각이다.
누가 됐던지, 그들의 주장을 그대로 수용하지 말고 반드시 비판적으로 들어야만 한다.
그래야 나를 지킬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