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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아 Jul 31. 2016

사피엔스의 운명

알파고보다 중요한

 근래 가장 재미있었던 책은 사피엔스다. 서점에 들러 호기심에 들춰봤는데 20페이지정도 읽었나? 흥미진진했지만 서론의 후킹이 아닐까 불안했다. 중간부터는 분명 지루해져 반도 못읽고 책장에서 썩힐 것 같은 두려움이 엄습했다. 구입하지 않고 나우유씨미를 보러갔다. 그런데 영화를 보는 내내 책을 마저 보고싶어졌다. 그래서 중간에 나와 사피엔스를 읽으러갔다. 책은 끝까지 훌륭했다.


    

이런 책 잘 못 읽는데 정말 잘 읽혔다


 저자는 역사, 생물, 철학 등 인간의 편의대로 분류해 놓은 지식의 바다를 자유자재로 헤엄친다. 정신못차리겠는 독자를 위해 깊은 잠수경을 넣어놓고 친절하고 위트넘치고 - 거기다 문학적 감수성까지 풍부하게- 설명하고 있다. 자 여기서 잠깐 틀어볼까요? 깊은 물살 안에서 호흡하듯 사피엔스와 네안데르탈인의 생존부터 수렵채집인의 히피적이고 무소유적인 삶에 대한 예찬, 돈과 국가라는 인간이 만들어낸 허구적 상상력, 오늘날 행복이라고 여겨지는 인간의 믿음에 대해 약 600페이지 가량 서술하고있다.     


 지구를 점령하고 있는 사피엔스라는 종은 생성됐을 초창기에는 바퀴벌레만도 못한 먹이사슬의 최하층에 위치했다는 다소 충격적인 증언으로 책은 시작한다.


 빨간책방에서 이 책에 대해 '유발 하라리가 다소 휴머니즘적인 정서에 비켜서서 냉소적이게 인간사의 과거와 현재를 조망하고 있다'는 의견이 있었다. 이 책이 냉소적으로 읽히는 이유는 (특이하다고도 할 수 있는 지점) 유발이 책 전체에서 객관성을 지키기 위한 노력을 부단히 하고 있다고 느껴진다. 자신이 속한 사피엔스라는 개체로서의 입장이 아니라,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하나의 ‘동물’로서 인간 사회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예를 들면 이런 질문이 그렇다. 우리 인류는 자신이 개나, 침팬지와는 우월한 종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만약 무인도에 떨어진다면, 인간은 개나 침팬지보다 더 오래 생존할 수 있을까? 라는 물음이다.


즉, 인간이 지구를 지배할 수 있었던 이유는 결코 한 개인의 우월성이라기보단
사피엔스라는 종의 전체적인 업적때문이라고 그는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과 개인의 업적들을 공유할 수 있게 된걸까?


1. 많은 사람들과의 유연한 협동, 소통 능력 | coorporate, flexibly, with large numbers


인간만이 언어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른 종들도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과 협동하고, 의사소통할 수 있는 종은 사피엔스가 유일하다. 오늘날 인간의 네트워크는 점점 광활하게 증가하고 있다.


2. 상상력 | objective reality + fictional reality


 우리가 중력을 믿건, 믿지 않건 지구상에 존재하는 중력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나 만일 내일부터 대한민국의 돈은 가치가 전혀 없고, 바닥에 떨어진 돌덩이가 진짜 물물교환에 중요한 가치를 지니더라고 모두가 믿기 시작한다면 (과거 유럽에서는 알루미늄이 금보다 더 귀했던 것처럼. 신분이 낮은 자에게 금수저와 금포크를 대령하고, 높은 고위관직, 왕족일수록 알루미늄으로 만든 식자재를 사용했다고 한다!) 금방 변할 것이다.


 인권은 어디에 있는걸까? 모든 사람들은 평등하다 라고 헌법에 명시돼 있지만 실체는 없다. 그러니까 모든 인간에게는 인권이 있다고 믿지만, 실제로 몸을 해부해보면 심장, 장기, 혈액 등이 흐를 뿐, 인권을 인간 내부에 실제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저자가 이 책에서 던지고 있는 질문들


역사

학문분과로서 역사학이 지닌 가장 뚜렷한 특징 중 하나는, 특정한 역사 시대에 대해 많이 알면 알수록 왜 하필 그런식으로 전개되었으며 다른 식으로는 전개되지 않았는지를 설명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진다는 점이다.
p. 338


 어쩌면 우리가 지극히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사실들. 인간은 왜 포유류 중에서 유일하게 직립보행을 시작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역사란 적자생존, 자연선택설과 같이 설명할 수 있는 형태로 ‘발전' 한 흐름이 결코 아니며, 수렵채집인에서 농경사회로의 전환이 과연 인간에게 이로운 결과를 낳았다는 이 시대의 통념조차 반박하고 있다. 농경사회로 접어들며 인간은 먹을 것이 증가했고, 신체가 훨씬 편리해졌으며, 따라서 인구 수도 크게 늘어났다. 그러나 사피엔스라는 ‘종’의 발전은 결코 개개인이라는 ‘개체'의 진화와는 무관하다는 사실을 밝힌다.


현대인의 식생활

 오늘날의 풍요사회에 건강에 가장 심각한 문제는 비만인데, 그 폐해는 가난한 사람이 (이들은 햄버거와 피자를 잔뜩 먹는다) 부자들보다(이들은 유기농 샐러드와 과일 스무디를 먹는다) 훨씬 더 심각하게 입는다. 미국 사람들이 해마다 다이어트를 위해 소비하는 돈은 나머지 세상의 배고픈 사람 모두를 먹여 살리고도 남는 액수다. 비만은 소비 지상주의의 이중 승리다. p.493


 유발이 한국의 먹방을 보게된다면 뭐라고 말할까? 아마 비판할 것 같은데, 이에 대해서는 할말이 없다. 나도 먹방을 종종 보곤하는데, 어쩔 수 없이 빠져드는 묘기같은 것들이 그 안에 녹아있다.


  인류역사에 등장한 유례없는 수요를 넘어선 공급시대다. 엄청난 양의 음식이 버려지고, 이를 처리하는 비용 또한 천문학적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역시 욕망의 발전은 전체의 진화에 발맞추지 않았구나 앞으로도 그건걸까 하는 비관이 생긴다.


동물

결론적으로, 우리는 다른 모든 동물의 운명을 깡그리 무시할 때만 현대 사피엔스가 이룩한 전례없는 성취를 자축할 수 있다. 우리는 스스로를 질병과 기근으로부터 보호해주는 물질적 부를 자랑하지만, 그중 많은 부분은 실험실의 원숭이, 컨베이어 벨트의 병아리의 희생 덕분에 축적된 것이다. 지난 2세기에 걸쳐  수백억 마리의 동물들이 산업적 착취체제에 희생되었으며, 그 잔인성은 지구라는 행성의 연대기에서 전대미문이었다. p.535


 유발은 채식주의자다. 산업사회로 넘어가며 공공연하게 벌어지고 있는 대량 동물 살육에 대해 비판한다. 사피엔스라는 종이 다른 동물들, 벌레들, 심지어 아메바까지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와 크게 차이나지 않는다는 그의 관점이 책 곳곳에서 등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생명체를 학살하고, 먹는 행위는 또한 논리적이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는 인간은 먹이사슬의 정점에 선 순간부터, 다른 동물들을 착취하고 심지어는 같은 인류끼리의 학살을 자행하는 잔인성을 지적한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탄생할 생명공학적 신인류, 영원히 살 수 있는 사이보그가 진화하지 못한 인간에게 폭력과 차별을 가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왜냐면 권력을 지닌 존재인 우리는 이미 제3세계의 어린 아이들, 취약계층, 빈곤층에 대해서도 충분히 차별적이니까.


 부자는 따로 떨어져 있는 부자동네에 살고, 따로 떨어져 있는 일류학교에도 다니며, 병원치료도 시설 좋은 외딴 곳에서 받도록 만드는 위계질서다. 하지만 대부분의 부자가 부유한 이유는 그저 부잣집에서 태어났기 때문이고, 대부분의 가난한 사람이 평생 가난하게 사는 것은 그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라는 것도 이미 증명된 사실이다. p. 200


행복에 대한 견해

“인간은 새로운 힘을 얻는데에는 극단적으로 유능하지만 이 힘을 더 큰 행복으로 전환하는데는 매우 미숙하다. 우리가 전보다 훨씬 더 큰 힘을 지녔는데도 더 행복해지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유발하라리 인터뷰 중

 

까페에서 읽기 좋은 책. 근데 무거워서 들고다니긴 어렵다. E북 추천


이 책은 인류의 과학적 질문에 대한 백과사전같다. 일반적으로 믿어온 과학적 사실부터 통념까지, 정말 그러한가에 대한 물음이다. 소크라테스의 무지에 대한 지각이라는 지식의 선언과 다를게 뭐야? 질문이 주는 파괴력에는 실로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있다.


 과학의 발전은 인간의 욕구 그대로 발맞춰왔다는 사실이 우리가 앞으로 해야만 하는 질문과 이어져있다.  돼지를 거세시켜 육질을 부드럽게 만드는 과학적 연구에 대한 투자가, 갓 태어난 새끼 돼지가 어미와 떨어졌을 때 얼마나 심리적으로 불안한지를 연구하는 투자보다 훨씬 막대했다는 것처럼 말이다.



 유발은 우리가 어떤 욕망을 가져야 할지도 스스로 설계할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다고 하는데, 이 현상이 어째서 섬뜩하다는 것일까? 오히려 지난 과오를 뉘우치고 욕망의 방향을 지구상의 생명체들을 아우를 수 있게 설정한다면, 지나치게 낙관적인걸까. 알겠다. 충분히 인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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