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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아 Jul 03. 2016

여름에 읽는 하루키

태엽감는 새

Q. 하루키의 소설에 대한 논란 - 예를들면 이것은 문학인가?


"하루키의 소설을 읽으면 소설을 쓰고 싶어진다 - 혹은 쓸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 든다"

- 이동진의 빨간책방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하루키 또한 '그게 소설이라면 나도 그정도는 쓸 수 있다'라는 말에 동의했다.

하지만 적어도 그렇게 말한 사람 중 아무도 소설을 쓰지 않았고 자신은 썼다고 말한다.

소설을 쓰고 쓰지 않고는 필연성의 문제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에게 있어서 그녀는 유능하고 느낌이 좋은 동료였다. 

우리는 한방에서 일을 하고, 농담을 하고, 가끔 함께 술을 마시기도 했다.

그러나 이렇게 일을 떠나 그녀의 방에서 그녀의 몸을 안고 있으니, 

그것은 단지 따뜻한 고깃덩어리에 지나지 않았다. 

결국 우리는 직장이라는 무대 위에서 각자 할당받은 역할을 연기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한번 그 무대를 내려와 버리면, 거기서 교환하고 잇던 잠정적인 이미지를 지워버리면, 

우리는 모두 단지 불안정하고 불필요한 고깃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 p. 215 / 태엽감는 새 1 



Q. 하루키의 소설은 정말 '쿨'한가


언제나 여름에 읽는다. 장마가 쏟아진다거나 폭염이 아스팔트를 지질때 읽기 알맞는 소설이다.

쿨하다기보단 '안전하다'는 느낌이 적절하다. 비평보다는 번역을 좋아하는 작가의 성향이 투영된다.

어떤 풍경이 눈앞에 펼쳐져도 결코 소란을 피우지 않는 바위같은 주인공을 따라 책장을 넘기면 된다. 

감정을 감각으로 표현한다는 점에서도 이성적이다-쿨하다는 생각이 든다. 

요컨대 '짜증이 난다' '화가 난다' 는 용어를 절대 사용하지 않는다.



Q. 하루키의 단편 or 장편 or 에세이 중


장편이 좋다. 가장 추천하는 책으로는 1Q84. 

긴 긴 장편소설이 끈질기게 흥미진진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저력이 담겨있다.

읽고 있는 사람을 지워버리게 하는 마력을 갖게하는 소설들이다. 

책을 들고 읽다보면 어느새 책을 잡고 있는 감각도 잊게한다.

그의 소설은 독자를 바다로 뛰어든 소금인형처럼 만든다. 

소설을 재미를 위해서 읽는다면, 웹소설보다 1Q84가 낫지 않을까.  

어디까지나 무게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Q. 비디오 게임


하루키는 현대소설을 '비디오게임'이라고 표현했다. 

19세기에는 상류계층들이 한가하게 앉아 아주 두꺼운 책을 읽어댔다.

그들이 현존하는 고전문학을 만든 독자들이다. 

그러나 지금은 독자가 변했다. 모두 바쁘고 읽어야 하는 활자는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그래서 작가들은 주인공을 '비디오 게임' 속 플레이어처럼 기능하게 한다.

소설 속 주인공의 움직임은 말하자면 A로드를 가시겠습니까? B로드를 가시겠습니까?

물약을 먹겠습니까? 퀘스트가 있습니다! 같은 거라 생각한다. 



Q. 소설 속 등장인물의 당위성에 대해 


한번도 '-해야한다'고 말하고 있지 않다. 

그는 학생운동이 격렬했던 대학생시절에도 철저한 개인주의자였다. 

그의 소설에는 완벽한 악인이 없다.

유일한 리얼리즘 소설이었던 상실의 시대에서도, 네거티브 캐릭터는 없었다.

그럼에도 본인 스스로의 삶은 완벽한 절제와 금욕 - 통제로 이뤄진 일상이다.

샐러드와 두부를 먹고 (아마 채식을 하지않을까?)

새벽 네시에 일어나 작업을 하다 마라톤이나 수영을 뛴 후에 아홉시에 잔다.

어쩌면 하루키의 삶은 사람들이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작가로서의 삶보다는 

(예컨대 길 위에서의 작가인 잭 케루악같은?)

수도승이나 고행자의 일상과 비슷할 것이다.


그래도 어쩐지 싫은사람, 혹은 비판하고 싶은 인간상을 말할 땐 이렇게 한다.


 그와 만난 뒤 한동안, 나는 뒷맛이 몹시 씁쓸한 감정을 지닌 채 지냈다. 마치 입안에 고약한 냄새가 나는 벌레를 한 움큼 집어넣은 듯한 기분이었다. 벌레는 토해냈지만 그 감촉은 아직 입안에 남아 있었다. 나는 며칠 동안 계속 와타야 노보루를 생각했다. 뭔가 다른 것을 생각하려 해도 와타야 노보루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콘서트에 가고, 영화를 보았다. 직장 동료와 함께 야구 경기까지 보러 갔다. 술을 마시고, 언젠가 짬이 나면 읽으려고 아껴두었던 책을 읽었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내 시야 안에 있었고, 팔짱을 끼고 흐리멍덩한 늪과 같은 불길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것은 나를 초조하게 했고, 내가 서 있는 기반 같은 것을 심하게 흔들었다.

 p. 160 / 태엽감는 새 1



Q. 하루키와 리얼리즘


본인이 그려내는 초현실주의적인 내용과는 상이하게 

하루키가 언급하는 작가는 리얼리스틱한 분야의 작가들이다. 

그의 이상은 챈들러와 도스토예프스키를 한 권에 집어넣는 것이다.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동안 계속 음식을 먹는 남자의 이야기를 예전에 어느 책에선가 읽은 기억이 났다.

오랫동안 심각하게 생각한 끝에 겨우,

그것이 헤밍웨이의 <무기여 잘 있거라>인 것이 생각났다. (중략)

 하지만 실제로 이렇게 조용한 집 안에서 시계 바늘을 쳐다보면서 

뭔가 일어나길 가만히 기다리자니 <무기여 잘 있거라>와는 달리 식욕 따윈 전혀 생기지 않았다. 

그리고 급작스럽게 식욕이 생기지 않는 것은 어쩌면 내 속에 문학적 리얼리티와 같은 것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하고 생각했다. p. 19  / 태엽감는 새 2


 처음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라는 소설로 문단에 등단하고

그의 소설 속 '환상'과 '모호함'은 많은 논란거리였다. 본인은 부정할테지만 어쩔 수없는 강박이 따라붙었을 것이다. 리얼한 세계에 대한 섬세한 설명과 이미지. 그걸 담아낸 것이 <상실의 시대> 였고,

많은 독자들이 반응했다. 하루키 본인 또한 리얼리즘적인 책을 쓸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 했다는 필연성이 있었다고 밝힌다.

 



END : :  '리틀 피플' - '태엽감는 새' '양을 쫓는 모험' 이 도대체 뭐냐고 묻는다면


모른다, 소설을 끝까지 덮고나서도 명확해지지 않는다.

세상의 많은 현상들이 그렇게 일어나기 때문이다. 설명될 수 없는 주인공의 여정, 알 수 없는 뭔가를 쫓고 질문하는 등장인물들,

그럼에도 그의 책을 기다리고, 모든 작품들을 읽는 이유는 '이미지'를 보기 때문이다. 

존재를 설명할 수는 없지만 책을 통해 볼 수 있다. 하루키는 소설을 쓰면서 스스로 최면에 걸린 것 같은 상태라고 말했는데

독자 또한 마찬가지다. 인간이 만들어낼 수 있는 세계의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경외감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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