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습기자 시절 오전 6시에 출근해 오후 9시에 퇴근하는 삶을 살았다. 하루에 하나씩 기사를 써야 했다. 평일 기사 발행을 맞추려면 주말에도 일 하는게 속 편했다.
그렇게 6개월을 살았다. 인턴 시절까지 합치면 1년이다. 메이저 언론사도 아니었고 출입처가 있었던 곳도 아니었다. 조선일보와 네이버라는 회사 두 곳의 합작회사, 즉 조인트벤처였다. 말이 삐까뻔쩍하지 실상은 성질 나쁘고 나이 많은 조선일보 출신 기자 한분이 네이버 찾아가 제안한 형태의 인터넷 언론사였다. 지금은 폐업했다. 꼰대들이 젊은 애들을 그렇게 굴려먹었던 회사였다.
6개월을 단 한번도 지각이나 결근 없이 성실하게 채워나가면서도 화가 잔뜩 나 있었다. 알량한 정규직을 살랑거리면서 본인도 감당 못할 과로노동을 조건으로 내건 꼰대 사장이 너무도 거지 같았다. 6개월간의 수습기간을 마치고, 정기자가 되자마자 때려쳤다. 스스로를 테스트하는 과정이었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이깟 거지같은 것도 해낸다면 무엇이든 해낼 수 있지 않을까. 정직원이고 시용기간이고 나발이고 니들 하란대로 해주지. 그치만 해낼 수 있다는 거 증명하고 내 발로 나갈거야. 뭐 이런 오기였다.
지금도 그런 오기가 드는 순간들이 있다. 아이 병간호를 하느라 밤을 샐 때, 그 다음날 비몽사몽한 아침에 대본과 기획안을 물어보는 PD의 전화를 받을 때, 마감일자가 하루하루 다가올 때. 머리는 띵하고 눈은 계속 감기는데 더듬거리면서 그냥 간다. 몸이 부숴질 것 같은 순간도 언젠간 끝이 있기 마련이다. 반드시 끝은 온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말은 이 세상에서 의심의 여지가 없는 몇 안되는 말 중 하나다.
그리고 시간 지나고 나서 보니, 다들 그런 아픈 시간을 하나쯤 갖고 있었다. 내 과거가 전혀 특별하지 않고, 오히려 양반이라 여겨질 정도였다. 누군가는 선배들에게 뺨을 맞기도 했고, 동료들에게 욕짓거리를 들었으며, 또 어떤 이는 일하다 죽을 고비에서 살아 난 경우도 있었다.
그 과거를 어떻게 실패한 시간들이라고만 말할 수 있겠나. 어떻게 허비했다고만 외면할 수 있을까. 그곳에는 젊음의 서툰 치열함과, 오갈 데 없는 객기와, 분노 같은 열정이 있었다.
연애도 마찬가지다. 당연히 넘어진다. 나도 쪽팔리게 차여봤다. 좋아하는 남자로부터 무관심만 받아봤다. 별 난리를 다 쳐도, 아무리 관심을 표현하고 좋다고 해봐도, 상대가 날 안좋아하면 안좋아하는 거다. 그땐 스킬이고 매뉴얼이고 다 필요없다. 싫으면 그만이다.
넘어져도 살아있는 한 다시 훌훌 털고 일어나야 한다. 넘어진 건 실패가 아니다. 장기간 연애를 하다 헤어졌다 해도, 결혼 얘기가 오가다 파혼한다 해도, 결혼생활을 하다 이혼한다 해도, 그것을 실패라 규정 지어선 안된다. 물론, 결혼 초기 다짐했던 '둘이서 평생 잘 살아보겠습니다'는 목표 자체에선 실패했을지 몰라도, 자신의 인생을 행복하게 살아가려는 목표에선 성공했으니까. 박수를 쳐 줘야 한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한 그럴 자격이 충분하다.
아픈 사람이 너무 많다. 스스로 내린 연애와 결혼이라는 결정이, 인생에 있어 부정적인 결과로 보일 때 좌절하고 무너진다. 자책하는 경우도 여럿 봤다. 그렇게 자기 자신에 대한 근간의 믿음이 흔들린 채, 마음을 다잡지 못하고 편의점에서 물건을 사는 사소한 선택까지 오랫동안 혼란스러워 하는 경우도 흔하다.
그럴 때마다 차라리 X년이 돼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당당하게, 뻔뻔하게 살면 어디가 어떤가. 주변 눈치 같은 거 보지 말고 자기 행복만 생각하면서 살아보라. 유튜브에 유명 신부님의 강연 중, "나는 착한 여자가 싫어요"라는 제목의 연설이 있다. 가족을 위해 평생을 참고, 인내하고, 희생하면서만 살다가 늘그막에 암에 걸려서 내 인생 대체 뭐가 남았나 울부짖는 사람들을 보면서, (특히 여성들을 보면서), 그런 사람들이 싫다는 신부님의 말이었다. 종교를 떠나 공감 가는 내용이었다.
자기가 욕망하는 바를 꺼낸다고 해서 아무도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쁘다고 생각하면 그 사람이 잘못된거고, 가스라이팅 하는거다. "나는 결혼하고 나서 생활비는 OOO 정도는 쓸거야", "나는 결혼식장 OOO 밑으로는 안해", "프로포즈는 이렇게 했으면 좋겠어" 등등 요구사항을 솔직하게 말해라. 허무맹랑한 요구라 생각이 든다면 상대가 알아서 정리할 것이다. 그럼 더 좋은거 아닌가? 괜히 어정쩡하게 기준을 낮추거나, 마음에 들지도 않는데 애매하게 넘어가질 말란 얘기다. 마음에 안들면 안드는대로, 솔직하게 다 말해라. 그리고 함께 해결책을 찾아라.
상대는 독심술사가 아니다. (남자나 여자나 모두에게 해당하는 말이다. 자꾸 내 글 보면서 페미니스트다, 안티 페미니스트다 어쩌구 저쩌구 댓글로 추정해대는데 미안하지만 시간낭비다. 난 그 두 부류가 서로 혐오하다 사랑에 빠지는 로맨스를 그려내고 싶은 장사꾼일 뿐. 또 내가 여자니까 예시로 든게 여자 쪽이 많을 뿐이지 무슨 특정 성별을 옹호하는 말이 아니다. 아무튼 혐오의 세상이다.)
그러니까, 말을 해줘야 한다. 솔직하게 소통하는 사람들이 '깬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지언정, 속내를 감춰서 억울해지진 말아야 한다. 다른 사람이 날 어떻게 생각할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나의 욕망을 마주하고 있는가. 내가 원하는 바를 스스로 인지하고 있는가가 우선순위다. 그리고 그것을 아는 X년들이 인생을 행복하고 남부러울 것 없이 산다.
https://www.youtube.com/watch?v=hLQl3WQQoQ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