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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아 Feb 26. 2017

예민함을 지켜줘

곧 은퇴하시는 S 차장님.

말을 끊임없이 하신다.

“채동현(#가명#라디오진행자)이가 말야, 오늘 나한테 인사도 안하고 가는데

그 싸가지를 말이야,” 


똑같은 어조로 누군가에 대한 이야기를 멈추지 않는다.

또 어느 때는 프로그램별 가계부를 들고오셔선


“우리 조연출이 통큰 것좀 봐봐. 얘 돈 쓰는 거 장난 아냐.

나는 한달에 이십만원으로 버틴적도 있는데 얘 봐 얘 봐”  


라디오가 흘러나오는 사무실에는

S 차장님의 하소연도 키보드 자판 두들기는 소리, 마우스 달칵거리는 소리,

커피를 홀짝이는 소리의 일부다.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각자가 모두 각자의 일을 하고 있다.   

S 차장님의 말을 누군가 받는다. K 차장님이다.

“(보지도 않고) 어후 그랬어요. 

어후 화나. 화나

(행정부에게 자료 넘기며) 이것 오늘까지 처리해줘”  


행정부 Y, 별명은 행정이다.

“에엑?! 차장님!! 이걸 오늘까지 어떻게요?!”  


산적 K 차장님. 옛날에 호랑이 다큐멘터리를 찍느라

시베리아 눈 벌판에서 동굴을 파고 1년을 계셨던 분이다. 


“미안 깜빡했어. 스트레스 받지 마. 쪼꼴릿 먹을래?”

그 귀여움에 작은 실소가 터져나오고.


커다란 헤드셋으로 영화를 보고 계시던 J부장님, 날 부르신다.  

공교롭게도 본사는 산 밑에 위치해있다.

작은 문을 열고 나가면 바로 산으로 연결되는 게 꼭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랑 닮았다.  


그 산과 연결된 다리 위에서 J 부장님은 담배를 피시고 난 콧물을 훌쩍인다.  


“회사에서 하고 싶은 건 다 해봐야 해.

어 하는 사이에 정년 퇴직이야.

시간이 얼마나 빨리 가는데...”  

J 부장님은 입사 당시, 히키코모리셨단다.

학교도 안나가고 골방에 틀어박혀 음악만 들었단다.

사람이 무서워 여럿이 함께 있을 땐 한 구석에 웅크려서 움츠려있는.

그런 분이 어떻게 한 직장에 이렇게 오래 있을 수 있었을까 싶지만

여기면 그럴 수 있겠구나 납득이 간다.  


“그래서인지 나는 누구 뽑으려 치면 깨지고 다친 애들만 뽑게 돼.

어디 하나 모서리가 엇나가 있는 애들...

절벽 끝에 서 있는 것처럼 조마조마하게 느껴지는 애들..

그런 애들이 마음이 가더라구..

근데 이것들이 뽑아놓으면 자리도 못잡고 금세 떠나버려

가르쳐놔서 쓸만하면 가버리고, 키워놓으면 여행간다 그러구...

여행도 뭐 2-3년은 기본이야 요즘은”  

부장님이 날 뽑으신 건 아니지만.


이런 말씀을 해주신단 건 분명 내가 잘 적응하고 있다는 뜻일거다.

입사한지 한달가량 돼가지만 술 한모금 안마셔도 됐고,

부자연스러운 인간관계의 확장과 안면트기라는 명목으로 밥 약속 같은 것도 없었다.


각자의 스케줄과 상황이 유동적이어서 회사 사람들은 혼밥을 즐기는 듯 했다.

점심은 안먹는 나도

편하게 간식같은 걸 먹으면서 그날 그날의 업무 스케줄을 짤 수 있었다.  


사실 이상적인 근무환경이라는 게 정말 별거 없다.

회사 건물은 체르노빌을 연상시킬 정도로 곰팡이 슬고, 

손때묻은 벽지에, 낡은 가구들 뿐이지만

화장실은 깨끗하고 수압도 세다. 따뜻한 물도 곧잘 나온다.  


이런 기능적인 부분은 차치하고서,


각자의 개성과 성향을 존중해주기만 해도 된다.  


열두시에 땡 치면 우루루 몰려가서 밥을 먹고 한시까지 또 우르르 돌아와야 하고

여섯시쯤 넘어 상사 눈치 보면서 빈 모니터만 달칵거리고.

그렇게 지하철 타면 수많은 인파에 납작해져서 너덜거린채 집으로 귀가해야한다.  


모두가 똑같이 관습적으로 하고 있는 고정적인 틀만 벗어나도 

삶은 나의 취향으로 꾸려갈 수 있다. 

행복이란 게 정말 별게 아닌데. 


싫은걸 하지 않을 수 있을 때 사람은 행복해진다.


오늘 내일 모레 먹고 사는 것에 그토록 걱정스러운 이유도

모두 하루가 좀 더 충실하게 행복해지기 위해서다.

그러니까 학생 때 교복도 좀 줄여보고 (가능하면 사복이 좋겠지만)

머리도 좀 볶아보면서 사는게, 본인의 취향대로 멋대로 즐겁게 사는거 아니겠나.  


어 하는 새에 10대가 모두 끝나버린다는 걸 

우리 모두 경험했다.


두발규제니 교복이니 하는 건 한국 사회에 뿌리깊게 박혀있는 집단주의적

군대식 문화에 대한 단편적인 예시일 뿐.  

아직도 빈약하고 메마른 상상력이 지배하는 곳이 즐비하다.

그런 곳엔 사람이 고통받을 수 밖에 없다.  


오늘은 일요일이다. 몇 시간 후면 월요일.

대한민국의 월요일이 조금은 덜 고통스러워지길 바라는 마음에서

이번주 방송 스케줄표를쳐다보다 끄적인다.

 


본사는 곧 철거=이전된다.

집기들이 이토록 그로테스크하게앞에 쌓여있다.

곧 무너지는 미로같은건물을 휘젓고 다니다보면 묘한 영감이 떠오른다.

예를 들면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같은



영롱한 점심 되시겠다.

샌드위치의 미학이란.
월급은 짜지만 난 잘난 YOLO욜로 족이니까.


난 정말 이런 소소한 것에도 깊은 감명을 받는 소박한 사람인데

때때로 걷잡을 수 없는 야망에 불타 괴롭다.

지금도 그 야망에 못이겨 이렇게 브런치를 쓰고 있자나. 자러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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