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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아 May 23. 2017

이우학교 졸업생

언론을 통해 밝혀졌듯, 내가 졸업한 학년에서 두명의 학부모님이 대선에 나갔다.

뜨거운 관심과 함께 나의 모교는 ‘귀족학교’라는 프레임으로 조금 진통이 있었다.

80명밖에 되지 않는 한 학년인데 확률로 치면 얼마일까?


그건 그렇고 작년에 봽지 못했던 선생님들을 봬러 스승의날 다음날 이우 언덕을 올랐다.

여전히 학교에 가는 길은 교통편이 험난했고, 햇빛이 쏟아졌으며

그래서 약간 정신이 혼미했다.    


고교 3년 중 2년동안 담임을 맡으셨던 선생님은 아마 내 기억에서 잊히지 않을 것이다.

그분은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진심으로 학생들을 만나기 위해

온 정성을 바치는 선생님이셨다.

교사들이 갖고 있는 보통수준의 무관심같은 게 없었다.

(이 무관심은 교사에겐 필수적이고, 가장 중요한 안전도구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우리에게 건네는 말 한마디에도 그 누구의 마음도 다치지 않기 위해,

소외감을 느끼지 않게 무진장 애를 쓰셨다.    

하지만 그 애씀과 노력은 열여덟, 열아홉의 나에겐 너무나 장황하고 무겁게만 와닿았다.


선생님께서 우리에게 더 좋은 사람이 되라고 노력하라는 메시지,

진정한 인생의 가치를 찾아보라고 하는 응원의 말 따위는

수능을 앞둔 나에겐 무책임하고 비현실적이기만 했다.


선생님과 아침시간에 만날 땐 고개를 박고 귀를 틀어막은 채

듣는 것을 거부했던 적도 있었다.     


얼른 졸업해야지,

서로에게 맥없이 관심갖기를 강요하고,

포용만이 정답이라는 무력한 상대주의의 딜레마,

효율성 제로인 모든 의사결정 과정에서의 길고 지루한 토론과 합의,     


이우는 그랬다.

무엇보다도 교복도, 두발규제도 없었던 학교에서 가장

강력했던 건 같이 있는 친구들의 눈이었다.    


다자이 오사무의 책 <인간실격>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저는 일부러 될 수 있는 대로 엄숙한 얼굴로 철봉을 향해 에잇 하고 소리를 지르며 달려가서는 그대로 멀리뛰기 하는 것처럼 앞으로 날아가 모래밭에 쿵 엉덩방아를 찧었습니다. 모두 계획적인 실패였습니다. 예상했던 대로 모두 폭소를 터뜨렸고 저도 쓴웃음을 지으면서 일어나 바지에 묻은 모래를 털고 있으려니까 언제 왔는지 다케이치가 제 등을 찌르면서 낮은 목소리로 이렇게 속삭였습니다. “부러 그랬지?” - 인간실격 중    



익살스럽고 능청스러운 연기로 주위사람들에게 호감을 샀던 주인공은

다케이치라는 친구에게 그 수를 읽힌다.

그리고 최초로 패배감과 좌절감을 맛본다.    

이우에 들어가서 느꼈던 감정들이 비슷했다.


착한 아이 콤플렉스, 뒤틀린 경쟁심, 소심하고 말이 없는 친구를 업신여기는 오만함

같은 것들과 싸우며 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아직도 내 인생엔

성공에 대한 단편적 기준, 앞에 깔린 경쟁레일, 공허한 기대감들이 즐비해있다.


하지만 귀를 틀어막고 고개를 책상에 박은 날 기다려준 선생님들이 계셔서

나는 조금은 괜찮은 어른이 될지도 모른다는 희망에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방송국 말단에서 이사람 저사람에게 치이는 내게

선생님은 고1 학생들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얘기를 나누게 한다.    


아이들은 여름에 돋아난 풀처럼 선명하게 싱그러웠다.

왜 바라만 보고 있어도 좋다는 말이 있는지, 그 때 비로소 실감했다.    


몇 그램의 의심과 경계, 수업은 따분하다는 표정,

그럼에도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한번 지켜봐주겠다는 약간의 호기심.    

교실에선 그런것들이 흘러나온다.


이런 학교를 수식하는 귀족이라는 단어는,

상상력이 빈곤한 사람들이 만들어낸 어쩔 수 없는 어휘가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한다.    


이우에서 만들어가고 있는 것들이

수업중 옆에 자고 있는 친구를 깨워주고,

사소한 질문에도 귀를 기울여주며,

어떤 결과가 나올지라도 같이 머리를 맞대서 같이 해결해보자는 배움이라면,

이 사회에서 만들어내고 있는 것들 중 가장 정성스럽고 가치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귀족이라면, 아주 조금은 '그래 그런 단어로밖에 설명이 안된다면' 이라 대답해줄 순 있다.    

하지만 등록금이 비싸다느니,

고위층 자녀만 들어갈 수 있는 학교라는 오명은 분명 오류투성이다.    


이는 학교가 설립됐던,

대한민국의 교육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길을 만들어가고자 분투했던 시절들에 대한 모욕이다.

학교가 설립되던 2003년, 대안학교란 머리 노랗게 물들인 문제아들만 가는 학교라며 손가락질 받았다.

그 과정에서 많은 학생들이 다쳤고, 그걸 지켜보는 선생님들도 참 고독하셨을 것이다.


나 또한 대안학교에 진학한다고 밝히자 중학교 선생님들의 반응이 싸늘했던 걸로 기억한다.    


그러니 올해는 아예 새로운 편견들이 끼워지는 것 같은데,

무엇보다 지금 학교를 다니고 있는 아이들이 상처를 받을까 걱정이다.


외부 시선에 대해 예민하게 느끼는 아이들은

스스로를 자꾸 그 시선에 맞춰 재단하고 검열하기 마련이니까.


제 후배들이 마음껏 눈치보지 말고 배울 수 있도록, 부탁드립니다.

혹여나 이우학교 다녀요 하는 아이에게

“어, 거기 귀족학교 어쩌구” 라는 설익은 아는척은 자제해달라는 마음에서

이렇게 글을 길게 쓰게 됐다.


어쩔 수 없이, 나같이 자수성가한 인물이 나타나

이우의 진정한 저력을 보여주어야겠구나 하고 칼을 갈아본다. (앗! 그러지 않기로 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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